‘장애인의 친구’ 대한성공회 ‘김성수’

김성수(87) 대한성공회 주교는 ‘우리 사회에 평화의 씨앗을 뿌려온 성자’라는 평을 듣는다. 대한성공회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6·10 국민대회의 서막을 열어 민주항쟁의 불씨를 지핀 주역이다. 성베드로 학교를 세워 지적장애인을 교육했고 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오갈 데 없어지자 일터까지 만들어 그들을 보살폈다.
이런 업적이 마치 과거의 영광일 뿐이라는 듯, 그는 지금 인천 강화도의 인적 드문 곳에서 평범한 할아버지처럼 살고 있다.
김성수 주교가 촌장으로 있는 인천 강화도 온수리 ‘우리마을’. 60명 정도의 지적장애인들이 생활하고 일도 하는 곳이다. 입구에 도착해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건물 옆에 딸린 고구마 텃밭을 둘러보다 나오는 김성수 주교를 만났다. 진달래색 생활한복에 짙은 청바지를 입고 팔을 앞뒤로 크게 저으며 걸어오다가, 기자를 만나 환하게 웃었다.
한참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 마을에서 생활하는 지적장애인 두세 명이 김성수 주교 앞을 지나갔다.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이들은 김 주교를 발견하더니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밝게 웃었다. 김 주교도 “아유 최고야, 최고”라고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밝게 웃었다. 영락없는 손자와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Q. 이곳에서 장애인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A. 몇몇은 콩나물 공장에서 일하고, 몇몇은 두꺼비집에 들어가는 부품을 단순 조립하고 있어요. 일부는 고구마를 키우기도 하지요. 특히 콩나물은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기른 거라서 맛이 아주 좋아요. 친환경 인증도 받았고, 품질이 좋아서 생협과 풀무원에 납품하고 있어요.

Q. 장애인에게 특별히 관심 갖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A. 엄밀히 말하면 내 의지나 선택은 아니었어요. 영국에서 공부할 때였는데, 당시 한국에 있던 주교로부터 편지가 왔어요. 성공회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복지사업을 해볼까 하는데 맡아서 운영해보라는 내용이었지요. 이후 귀국 길에 영국, 캐나다, 미국, 일본의 선진 사례를 배우고 들어와서 특수학교인 성베드로 학교를 만들었어요.

Q.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A. 청소년기에 폐결핵을 크게 앓았어요. 병이 옮을까 봐 사람들은 나를 멀리했고, 이때 외로움을 크게 느꼈어요. 의사가 꼼짝 말고 누워 있으라고 했기에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았는데, 건강해지면 나처럼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김성수 대주교는 1930년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선산 앞 선대가 물려준 땅에 ‘우리 마을’을 세워 머물고 있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성공회가 처음 뿌리내린 곳이다. 그의 조부는 그 첫 세대 신자 중 한 명이다.
어린 김성수는 가족을 따라 자연히 성공회를 종교로 삼았다. 성공회 신명은 시몬. 집안은 유복했다. 그는 학창시절 온갖 운동에 통달한 스포츠맨이었다. 배재 중학교 졸업반 시절 아이스하키 경기 중 각혈을 했다. 폐결핵 3기,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고 그는 죽음과 마주 섰다. 8년을 앓았다. 골방에서 사람과의 만남도 피한 채 오직 의사가 시키는 대로 약만 먹고 누워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때마침 한국전쟁이 터졌다. 병든 몸이라 인민군 의용군 징집도 피해갔다. 친척들조차 그를 멀리했다. 오직 고독과 병마만이 그의 곁에 있었다.
김성수는 전쟁이 끝나고 단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부친 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나 전공과 무관하게 일생을 결정지을 인연을 만나게 된다. 성당 부설 성베드로 보육원에서 전쟁으로 남겨진 아이들을 돌보아주었다. 병마의 경험과 전쟁과 어려운 아이들의 모습이 그를 생각지 않던 운명의 길로 이끌었다.
서른한 살 늦은 나이에 신부가 되기 위해 성공회 대학교의 전신인 성미카엘 신학원에 입학했다. 연세대학 신과대학도 함께 수료했다. 당시 성미카엘 신학 원장을 맡고 있던 미국 출신 대천덕 (1918∼2002) 신부는 언제나 “노동은 기도이며, 기도는 노동”임을 강조했다. 대천덕 신부의 이런 가르침은 훗날 그의 행적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신학생 시절 그는 노동판에 취업하여 일한 적이 있었다. 세상의 어둠을 알기 위해서였다. 영산강 간척사업장과 탄광촌에서 몇 달 동안 막노동을 했다. 그곳 사람들은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위해 깊이 모를 암흑 속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든 세상을 보고 와서,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1964년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공회 사제로 서품받아 성직의 길을 걷는다. 몇 해 뒤 봉사활동을 위해 일본에 들렀다가 평생 도반인 프리다 여사를 만났다. 영국 출신의 선교사로 일본에 와있던 그녀와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을 가졌고, 말보다 먼저 마음이 통하여 며칠 만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겨우겨우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한국에 한 번 나오라”는 인사치레에 그녀는 덜컥 한국으로 건너왔다. 성공회 신부는 결혼을 선택할 수 있다. 나이 서른아홉에 푸른 눈의 아내와 결혼했다. 성공회의 본고장 영국에서 유학을 마친 후 그는 인천 성공회 성당을 맡았다.
1974년부터 그는 교회 밖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국내 최초의 지적장애인 대상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 초대 교장직을 맡아 10년을 봉직했다.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이 없던 시절이라 성공회 유지재단의 학교설립은 우리 교육의 질과 단계를 한 차원 높인 계기가 됐다. 그가 교장을 맡아 기틀을 세우고 제자리를 잡도록 애썼다.
그의 아내 프리다 여사도 학교를 위해 헌신했다. 남편의 종교 사회 활동에 평생토록 큰 영향을 끼쳤다.
성베드로 학교 교장을 맡던 중에도 그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기독교교화협의회(KNCC) 회장직을 맡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이 연속으로 터지던 시기였다. 게다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에 주저하지 않던 단체이다. 권력의 독재와 맞선 교회의 양심세력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이윽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한성공회와 성공회 서울 본당과 김성수 주교에게 세간의 관심이 쏠린 사건이 일어났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민주화 요구에 대해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헌법이 정당하다는 호헌조처를 발표했다. 정권 연장을 꾀하려는 군부 출신 세력에 국민의 저항이 시작됐다. 항거의 움직임이 있자 권력은 온갖 수단을 다해 국민의 움직임을 막으려 했다. 광장은 폐쇄되고 억압과 감시가 더해졌다. 6월 10일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순간, 전국적인 반정부시위가 시작됐다. 그날 정오 서울 정동 성공회 주교좌 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당시 낭독된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6·10 민주항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김성수 주교는 1984년부터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교구장을 맡고 있었다. 그날 정오 김성수 주교의 집도로 ‘4·13 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가 열렸다. 그는 종교인을 비롯한 양심세력과 함께 정치권에 국민의 뜻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이후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 대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주거점 무대가 됐다.
그 사건을 인연으로 성공회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높아졌다. 우리나라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백여 년, 5만 남짓한 조촐한 신자 수, 150여 개의 교회, 3개의 교구. 거대 교회도 없고 막강한 교세도 없지만, 성공회는 묵묵히 종교가 해야 할 일을 실천하고 있었다. 교회마다 저소득층을 위한 나눔의 집이 있고, 교세에 어울리지 않게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정신 지체아 교육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음성 나환자복지시설도 운영하고 있었다.
1992년 결의를 거쳐 이듬해 영국 켄터베리 관구 소속이던 대한성공회는 독립 관구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초대 관구장으로 김성수 대주교가 추대됐다. 1995년 대한성공회 관구장에서 물러나면서 김성수 대주교는 여생의 위업에 헌신한다.
유산으로 받은 고향 선산을 기증하여 ‘우리 마을’을 세웠다. 김성수 대주교가 ‘우리 마을’을 세운 것도 성베드로학교와 인연의 연장에 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갈 곳이 없어지는 지적장애인들에게 일하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위해서다. “장애인을 위한 최고의 복지는 일할 곳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곳에서 약 50여 명의 지적장애인이 밭을 갈고 콩나물과 버섯 등을 키운다. 불편한 몸놀림이지만 집중력과 성실함으로 극복한다. 반 정도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그 나머지는 출퇴근하며 일하는 삶을 배우는 곳이다.
김성수 대주교의 공식직함은 촌장(村長), 마을을 이끄는 어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장애인 시설을 기피하는 세간의 분위기와는 달리 계획을 발표하자 강화도 그의 고향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없었다. 그는 “선대나 내가 크게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고 했다. 덕분에 큰 마찰 없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땅은 기증하였지만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그야말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정부의 지원도 받았고, 한 푼이라도 기금에 보태기 위해 한때 정동 주교좌 대성당 앞에서 직접 커피를 타서 팔았다. 500원짜리 커피는 인근 직장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스스로 “오죽 답답하면 그랬겠냐.”고 하지만 대주교의 커피는 금세 입소문을 탔다. 그곳에만 손님이 몰리자 근처 커피 파는 아줌마들이 몰려와 데모까지 했다는 후일담도 있었다. 사람들은 작은 일을 통해 선행에 동참했다.
‘우리 마을’에서 키우는 콩나물과 채소는 강화도에서 판매된다. ‘우리 마을’ 생산품을 선전하기 위해 김성수 대주교는 방송에 콩나물을 한 보따리 들고 출연하기도 했다. 그런 덕에 이제는 제법 알려져 있다. 정신지체아들은 일한 대가로 한 달에 수십만 원까지 월급을 받는다. 돈보다 더 중한 것은 직업인으로서 자긍심을 갖는 일이다. 함께하는 식사시간에 그들이 외치는 기도는 ‘우리 마을’의 꿈을 분명히 들려준다. 김성수 대주교가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우리는”을 외치면 ‘우리 마을’ 식구들은 “최고다”로 화답한다.
그의 지론은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만한 사랑을 베풀 줄 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를 통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자비롭게 하는 길이 된다.
김성수 대주교가 대중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선 것은 2000년 성공회대학교 총장을 맡고부터이다. 성공회대학교 이사회가 그를 총장으로 임명한 이유는 “민주교육과 인권교육 평화교육을 지속해서 추진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돼 총장으로 선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성공회대학의 교육철학인 ‘한 사람의 일등보다 더불어 살 줄 아는 열 명의 사람을 가르치는 것’임에 충실한 결과다. 외적 성장과 팽창이 학교 발전의 척도가 되고, 더 많은 돈을 끌어오는 것이 학교 경영자의 능력으로 치부되는 세간의 기준과는 다른 길이 그곳에 있었다. 김성수 대주교는 늘 학생들을 믿는다고 했다. 학생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기억했다. 자신의 학생들을 일러 “참으로 성실한 이들이다. 세상은 결국 그런 이들이 바꾼다.”고 했다. 총장 임기를 두 차례 채우고 그는 이임식 없이 학교를 떠났다.

학교를 떠나 ‘우리 마을’ 촌장으로 살면서 그가 전력하는 일은 장애인 재활 전문 병원을 세우기 위한 비영리 공익재단인 푸르메 재단 일이다. 2005년부터 시작한 이일은 2012년 첫 결실을 맺어 재활치료기관인 세종 마을 푸르매 센터가 문을 열었다. 서울 상암동에 어린이 재활병원을 짓고 그 영역과 사업을 확대할 계획을 지녔다. 참으로 어려운 일 만을 골라 한길을 걸어온 삶이다.
“성 베드로 학교에서 공부한 뒤 졸업하고, 우리 마을에 취직하고, 여기서 일하며 번 돈을 저금했다가, 은퇴 후 양로원에 가서 일생을 마칠 수 있게 해주는 게 궁극적인 목표예요. 물론 우리 마을이 한국의 모든 지적장애인을 돌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사회에 지적장애인의 일자리와 노후를 보장해줄 수 있는 복지 모델의 예시를 보였다는 점이에요. 우리 친구들이 이곳에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역할도 충분히 해내면서 일생을 잘 마친 예시가 나오면 비슷한 유형의 시설이 많이 생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그러면 지적장애인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게 지금보다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요?”
“바르게 살면 그 앞이 환히 트인다. 마음이 정직하면 즐거움이 돌아온다. (시편 97장 11절)” 김성수 대주교가 가장 좋아한다는 성경 구절은 그의 삶의 모습과 똑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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