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발공장 직공에서 하버드 박사가 된 서진규 박사

‘지독한 가난, 학업 포기, 가발 공장 여공, 식당 웨이트레스’, 미국의 최고의 명문 대학 하버드 박사가 된 한인 서진규 박사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그녀에게는 숱한 시련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왜 나만 불행한 거야. 왜 나한테만 이렇게 많은 시련이 몰려오는 거야. 하나님도 무심하시지.”라고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련을 통해 가슴 깊숙이 성공을 향한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희망`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계획을 착실하게 실행으로 옮겨 가발 공장 직원이던 자신을 미군 소령, 하버드대 박사로 탈바꿈시켰다.
1999년 자전 에세이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의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서진규 박사는1948년 경상남도 월내라는 어촌마을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남동생 중 한 명은 미군 복무 중 사고로 요절했으며, 한 사람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이런 여건 탓에 주위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럴 때마다 반발심으로 ‘공부를 잘 해 꼭 성공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시골에서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올라와 큰아버지댁에서 살면서 풍문여고를 다녔다.
잡지 판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67년 종로구에 있는 가발공장에서 사촌 언니와 같이 일했다. 얼마 후에는 관악컨트리클럽 캐디로도 근무했다. 그러던 1971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삯 100달러만 달랑 가지고 미국으로 갔다. 한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틈틈이 영어공부를 했다.

매맞던 아내에서 미군 장교로

1975년에는 한국인 태권도 사범과 결혼했다. “제가 처음 결혼해 딸을 낳고 1년도 안 되었을 때인데 남편의 폭력이 있었어요. 자존심 때문에 남들에게 이야기를 못 하니까 안으로는 곪아 터지고 있는 거지요. 어릴 때부터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약자를 구해 주겠다는 꿈이 있고 희망이 있었는데 결국은 제가 도움도 못 받고 쓰러져가는 약자가 되어 가면서 분노로 복수의 불길이 타올랐어요. 사실 그 당시는 살인까지도 생각했었어요. 근데 모성애로 그걸 이겨 나오고 그게 바로 군에 입대하게 되는 동기가 되거든요.” 그 당시 딸이 3-4개월밖에 안되는 딸을 안고서 한없이 울면서 ‘세상이 너를 버려도 나만은 너를 지켜줄 것이다.’ 라며 결심했고 이를 피하려고 미 육군 사병으로 입대했다. 처음 군 입대했을 때 윗몸일으키기 한번 제대로 못해 쫒겨 날 뻔했으나 오직 끈기와 노력으로 이겨낸 일화도 소개했다.
일등병일 때 용산의 주한 미군 부대에서 군수 업무를 맡았고 상등병 시절에는 고된 훈련을 무사히 거쳐 장교로 임관하는 끈기를 보여줬다.
이후 독일과 일본 등 주로 해외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대학을 전전한 끝에 1987년 미국 메릴랜드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마흔 두 살 때인 1990년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입학했고, 2년 뒤에는 하버드대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대위 때 하와이에서 패트리엇 미사일 장교로 근무하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1996년 11월 소령으로 전역한 그는 2006년 당당히 하버드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러는 가운데 그의 딸도 어머니와 함께 하버드대학을 다녀 ‘하버드 최초의 모녀 재학생’으로 미국에서 화제가 됐다. 딸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 졸업 후 장교로 복무 중이다.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

그는 ‘서진규의 희망’이라는 3번째 책을 펴낸 후 ‘희망 전도사’로 전국 곳곳에 강연을 다니느라 분주하다. 또 한달에 한번 꼴로 미국에 건너가 영어판 책자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적인 성공전략 컨설턴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잭 캔 필드가 주도하고 있다. 잭 캔필드는 “미군과 하버드에서 살아남은 이 여성의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는 우리들의 삶에 무한한 영감과 새로운 희망을 향한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며 영어판 발간은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얼마든지 통할 만한 소재로 여긴다는 것.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서 박사를 만났다. 명함을 받았더니 이름 밑에 ‘희망 연구소 소장, 박사, 예비역 소령’이라는 직함이 보였다. 얼굴에는 나이답지 않게 소녀와 같은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저런 연약한 모습에서 어떻게 불굴의 정신이 나왔을까. 손에는 자신이 펴낸 자전적 에세이집 3권을 들고 있었다.‘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35만부,‘서진규의 희망’은 15만부 등 모두 50만부가 넘게 나갔다고 했다. 이어 자신의 딸 얘기가 나왔다. 서 박사는 이같은 사연과 함께 딸을 키운 이야기를 ‘희망은 또다른 희망을 낳는다’라는 제목으로 2000년 책으로 펴냈으며 지금까지 17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43살 때 하버드 석사과정 시작

서 씨로부터 미국에 온 이야기부터 들어본다.
서 씨가 40살이 넘을 때까지 하버드 대학과는 먼발치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가정부를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보고서 그 길 밖에는 제가 미국에 갈 길이 없었기 때문에 가정부로 미국으로 갔는데 수속하는데 2년이 걸리다 보니 가정부를 못하게 되었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만 22살, 영어는 겨우 화장실을 찾아가는 실력, 그러고 돈도 100 달러 밖에 없었다. 식당에 웨이트레스로 취직을 하게 되고, 그 이듬해에 꿈에도 그리던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낮에는 대학생이고 저녁에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사랑도 하게 되고, 나중에 하버드 대학까지 가게 되었지요.
“제가 미군에 입대해서 장교가 되고 나서 지역 전문가 과정이 있습니다. 지역 전문가를 도전했을 때 사실 떨어졌습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여자였기 때문에 일본 남자들과 협상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실패를 할 것이다. 그게 이유였는데 결국 설득해서 시험 봐서 뽑혔고, 그런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제가 하버드를 도전하게 됩니다. 지역 전문가 과정에서는 대학원도 보내주고 언어도 가르쳐주고 해서 일본어도 좀 유창하게 했거든요. 전에는 겁이 나서 생각도 못했는데 자신감을 가지고 43살부터 하버드 석사과정을 시작합니다. 제가 실패를 하면 우수한 여군 장교들 갈 길이 진짜로 없어진다는 사명감으 공부를 했더니 A 마이너스의 학점을 받으면서 2년 후에 석사 학위를 따더라고요.”
서진규 씨는 어린 시절 박사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그 과정을 하나씩 이루어 갔다.
“이왕에 하버드까지 들어 왔으니까 박사과정에 도전했지만 첫해는 떨어졌고 그 이듬해 합격했어요. 그러고 현역 장교였기 때문에 저는 일본으로 다시 발령을 받아 갔는데 지역 전문가로 뽑힌 것입니다. 군생활 20년이 끝난 다음 결국 하버드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50살이 다 된 나이였고, 저보다 30살이 어린 학생들과 같이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결국은 한국 나이로는 59살에 박사 학위를 따냈습니다. “

모녀가 함께 하버드에서 수학

서진규 씨는 딸 성아가 항상 든든하고 자랑스럽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미국 대통령상도 탔지요. 대통령상은 250만 명이 해마다 졸업할 때 141명에게 주는 상인데 거기에 뽑혀서 상도 탔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 전교에서 1등, 학생회장, 처음에 하버드 떨어져서 조지타운대학을 갔지만, 2년 후에는 결국 하버드로 와서 엄마와 딸이 동시에 같은 교정에서 딸과 공부를 하고 있어 남들은 누려볼 수 없는 최고의 행복을 누렸지요 하버드를 졸업했고 그리고 ROTC(학사장교)를 했어요. ROTC에서 4년 연속 1등도 했어요. 엄마를 뒤를 이어 미군에 입대하여 군에서도 다른 동료보다도 빨리 진급하고 하여튼 굉장히 잘하고 있습니다.
저의 딸은 한국의 한 방송사 ‘일요 스페셜’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했을때 어린 시절 꿈이 뭐냐고 물었는가 봐요. ‘저는 나중에 커서 엄마의 복제인간이 되는 게 꿈이 였어요’라고 답한 말을 나중에 전해 들었을 때, 아, 내가 살아온 보람이 있었구나! 자기 자식에게 그런 칭찬을 듣는다는 게 제게 굉장한 기쁨을 주었어요 “
서진규씨는 한국에서 천 번도 넘게 강연도 했다. 1999년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을 했고, 지금은 미국에서 활동하는데, “제가 2006년에 박사 학위를 끝내고 2년 동안 건강이 나빠서 한국에서 활동을 못하고 치료만 했어요. 지금은 다 낳았어요
요즘 출판일 때문에 매달 미국에 다녀오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 박사의 인생에는 영화가 몇 편 들어 있다. 미국사회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해요.”
서박사는 전세계인에게 꿈과 희망의 기회를 주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또 다른 꿈을 꾸면서 미국에서도 강연으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돈도 많이 벌어서 재력이 부족해서 공부를 못하는 젊은 학생들이나 가난한 기업가들을 도와주는 일도 하고, 자신이 했던 지역 전문가, 즉 군인 외교관 경험을 통해 남북통일에도 이바지하고 싶단다. 그는 앞으로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유명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사회자 겸 봉사자)처럼 살고 싶단다. 그리고 앞으로 미국 국무장관이 되는 것이 꿈이다.
그는 요즘 틈틈이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왜냐고 했더니 “세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면 내 마음의 꿈이 커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남북한이 통일될 때가 다가오고 있잖아요. 한국이 미국의 도움 없이는 평화적으로 통일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요. 그랬을 때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는 꿈도 꾸고 있고, 요즈음 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게 길이 아니면 다른 쪽으로 인도하시고 제가 지금 알지 못하는 능력까지도 깨닫게 해서 북한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도 길을 열어주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기에 10년 내에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이민자 출신인 매들린 올브라이트와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들이 해냈듯이 말입니다. 책도 잘 팔리고, 영화화 되고, 미국에서 강연도 휩쓸고, 하버드에서 국제사를 전공했으니 외교 역량도 있고, 장차 미 국무장관감으로 충분하지 않으냐.”며 웃는다.

큰 꿈을 꾸어라! (DREAM BIG DREAM!)

서 박사는 전 세계 한인 젊은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큰 꿈을 꾸고 젊은 시절에 나이 들어 할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쌓고 성공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철학인 “인간은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한번 주어지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좌우된다.”면서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그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세상이 비웃고, 조롱하더라도 자신만큼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켜줄 때 분명 꿈은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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