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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 바람이 불면

남반구의 작은 나라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오나 보다. 2월이 가고 3월이 되자 벌써 아침저녁으론 싸늘한 기운이 옷깃을 파고든다. 어제 낮엔 햇살이 유독 따사롭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름만 끝도 없이 찰랑거리기에 아직도 여름이 갈려면 먼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으쓱하니 해가 넘어가자 온몸을 휩싸는 저녁 공기는 아니야 나 벌써 와있어 하고 속삭이는 가을의 숨결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재에 올라가 책상에 앉았다.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펴들고 몇 쪽을 읽어나갔지만 어느 순간 책을 들여다보는 눈과 달리 생각은 세월의 뒤안길을 제멋대로 오르내리다 까마득히 지나간 대학 시절의 어느 순간에 멈칫거리고 있었다.

그 친구는 어째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일까
그 친구는 어째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일까 하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가을바람이 불면 나는 가슴이 시려, 아플 정도로 시려하며 어느 날 학교 근처 주점에서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하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철학과의 괴짜로 소문이 나 있던 그는 언제나 섬광처럼 반짝이는 두 눈과 상체를 움직이지 않고 걷는 특이한 자세로 교정에서 쉽게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명한 인물인 그가 4학년 1학기가 끝나가는 즈음에 별안간 두꺼운 겨울 외투에 맨발로 학교에 나타났다.
누구나가 반소매 여름옷을 입고도 덥다고 하는 날씨에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은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여전히 그 특이한 자세로 교정을 뚜벅뚜벅 걸어 다녔다. 의아해하는 다른 학생들의 눈길에 주눅이 들 만도 하건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빛나는 두 눈은 여전히 똑바로 앞을 보고 있었다.
서로 학과는 달랐지만 그와 나는 아주 가깝게 지냈다. 1학년 어느 날 우연히 도서관에서 옆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린 가까워졌다. 무슨 화제에서든 논리가 정연한 그와 자주 만나면서 나는 그가 괴팍해 보이는 것은 직선적인 그의 성격 탓이라는 것을 알았다.


“취기가 오를 만큼 올랐을 때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느덧 쇼펜하우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준비해야지. 동물은 오로지 현재 속에서만 살지만
인간은 현재만이 아닌 미래에서도 살잖아. 적절한 준비를 해야지.
아, 그때 스무 살을 겨우 두 해 더 넘긴 우린 왜 그렇게 심각했는지!”


“여름이 가면 곧 가을이 오잖아” 그렇게 입을 뗐다
오히려 그는 많은 면에서 순진했고 무엇보다도 무척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누군가의 말대로 그의 IQ 지수가 그의 키를 나타내는 센티미터의 수치보다 크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비록 시골의 고등학교였지만 고교 3년 동안 그가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 절로 수긍이 갔다. 그런 그가 나는 좋았다. 게다가 그는 독서량이 넓고 깊어 배울 것이 많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도 나를 좋아했고 인생에 대한 꿈과 고민이 많았던 그 시절 우린 얼마 안 되어 서로 속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그가 외투를 입고 온 첫날 나는 수업을 마치고 철학과 강의실이 있는 곳에 가서 그를 기다리다 만났다. 만나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숭동 뒷골목의 주점으로 갔고 자리에 앉아 소주를 시켰다. 그리고 소주가 나오기도 전에 나는 그에게 왜 그래 하고 물었다.
급하긴 하고 그는 대답 대신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았다. 궁금하잖아 하고 나도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우리의 눈빛이 허공 중에서 부딪혀 부서졌다.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여름이 오면 곧 가을이 오잖아 하고 그가 이윽고 입을 뗐다. 그래서 하고 내가 다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때 소주가 나왔고 우린 서로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가볍게 잔을 부딪친 뒤에 우리는 단번에 잔을 비웠다.
준비하는 거야 하면서 그는 스스로 잔에다 술을 부었다. 여름은 금방 가. 그리고 가을이 오잖아 하면서 그는 다시 단번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 천천히 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가을바람이 불면 나는 가슴이 시려, 아플 정도로 시려하고 말을 잇는 그의 눈동자에 무언가 물기가 어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준비하는 거야, 가을 준비하면서 그는 나의 잔에 술을 따랐다. 지난 삼 년은 그런대로 견뎠지만 올해는 못 견딜 것 같아. 마지막 해잖아. 맨몸으로 견디기엔 이제 너무 지쳤어. 그래 미리 준비하는 거야.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그의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무언가 내 속 깊이 침잠해있던 무의식이 그 순간 수면으로 올라와 참았던 숨을 내쉬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 무의식의 숨결 따라 나도 크게 숨을 내쉬며 나는 친구를 향하여 술잔을 들었다. 마시자!

스무 살을 두 해 더 넘긴 우린 왜 그렇게 심각했는지!
그날 우린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꿈결처럼 가버린 지난 삼 년의 추억,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졸업, 그리고 밤안개처럼 살금살금 다가와 어느덧 우리를 밑에서부터 사로잡고 있는 불안한 미래 등등, 우리는 끝도 없이 잔을 비우며 끝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취기가 오를 만큼 올랐을 때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느덧 쇼펜하우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준비해야지. 동물은 오로지 현재 속에서만 살지만 인간은 현재만이 아닌 미래에서도 살잖아. 적절한 준비를 해야지. 아, 그때 스무 살을 겨우 두 해 더 넘긴 우린 왜 그렇게 심각했는지!
그 여름 내내 그는 외투를 입고 맨발로 다녔다. 그리고 가을이 되자 신발을 신었다. 신발을 신고 학교에 며칠 나온 뒤 그는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려도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의 집을 찾았다. 가난하던 그 시절 전화가 없는 집이 많았고 그의 집에도 전화가 없었다. 그의 집엔 몇 번 갔었다. 미아리 산동네 골목길을 한참 돌아 들어가 그의 집을 두드렸을 때 나를 맞아준 건 그의 여동생이었다.
오빠 없어요. 닷새 전에 군에 입대했어요. 벌써 얼마 전에 자원했어요. 모르셨어요? 하고 오빠의 친한 친구가 어떻게 그걸 몰랐느냐고 힐난하는듯한 여동생의 눈길을 맞받을 자신이 없어 나는 별말도 못 하고 돌아섰다.
골목을 돌아 나오는 내 머릿속에선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흘렸던 말이 맴돌았다. 입대할까 봐. 졸업은 정말 웃기잖아. 뭘 졸업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졸업장 따서 취직하려고? 그런 요식행위에 내가 따라야 한다는 게 정말 웃겨.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흔들면 흔들수록 그의 말은 더욱더 생생하게 내 머릿속을 휘돌았고 급기야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나의 뇌리를 찔러왔다. 아야야. 나는 아픈 머리를 움켜잡고 긴긴 골목길을 허둥거리며 빠져나왔다.

“가을바람이 불면 나는 가슴이 시려”
그 뒤로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몇 달 뒤 나를 비롯해 그를 아는 친구들은 모두 졸업을 했고 학교 문을 빠져나갔다. 더러는 군대로 갔고 더러는 유학을 갔고 더러는 취직을 해서 사회로 나갔지만 아무도 그를 만났다는 사람은 없었다. 때때로 들리는 풍문은 그는 월남 파병에 자원해서 갔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가는걸 본 사람도 없었고 또 돌아온걸 본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잊혀 갔고 어쩌다 그를 아는 친구들끼리의 화제에 오를 때에 누구나가 하는 소리는 그 친구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가 고작이었다.
그와 가장 친했다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지금도 가을바람이 불면 그 친구가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가을 바람이 불면 나는 가슴이 시려, 아플 정도로 시려 라고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고 내 앞 저만치에서 외투를 입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몇 해 전인가도 여름 끝자락에 집 근처 바닷가에 서 있다가 마주쳐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의 생각이 났다. 오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감정이 그대로 살아있는지 그날 나는 가슴이 시렸다. 아플 정도로 시렸다. 그리고 못 견디도록 그 친구가 보고 싶었다. 그 저녁 돌아와서 시를 한 편 썼다.

이 가을에 바람이 불면

-가을바람이 불면 가슴이 시리다는 친구를 생각하며-

이 가을에 바람이 불면 누군가의 가슴에 일렁이는
다소곳한 설렘이고 싶다
황량한 삶의 들판을 달려가다 그만 삶의 끈이 놓고 싶어지는
누군가의 가슴에 살포시 다가가 바람 속에 묻어 있는

나만의 체온을 전하는 다소곳한 설렘이고 싶다
나의 다소곳한 설렘이 그의 가슴 속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되면 나는 또 나를 찾는 누군가를 찾아 떠나가겠다

이 가을에 바람이 불면 나는 벌써 다소곳한 설렘이 되어있다
바람 따라 일렁이면서 가을바람에 여윈 모든 가슴에게
작은 소용돌이가 되는 꿈을 꾸면서.


글_김동찬
<스콜라문학회 회원, 화요음악회 ‘정이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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