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NZ칼럼 기획칼럼 엄마! 소리쳐 불러보고 싶은 어머니

엄마! 소리쳐 불러보고 싶은 어머니

어머니 날 특집 맘에 두고 읽을 수필 2

1979년 5월 어머니와 아들(오빠와 동생) 넷이 함께 추억을 남겼다.

여든다섯 해,
어머니 삶의 고통은 끝이 났다.
행복은 짧았고 고통은 길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지도 모른다.
입관할 때 보여준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꽃피는 아가씨의 형상처럼 너무 아름다웠다.
“엄마”하고 부르면 방싯 눈을 뜰 것만 같았다.

생전에 불효만 했던 딸이어서 그랬을까. 야멸차게 정을 끊은 어머니. 꿈에라도 모습을 한번 보여주시지. 이십여 년 긴 세월이 막무가내였다. 딸자식이 아직도 자책하고 슬퍼할까봐 꿈길조차 피해주셨나.
딸도 천연덕스럽게 어머니를 잊은 듯 살아왔다. 어깨가 춥다고 자꾸만 이불깃을 끌어올린다. 배불리 먹어도 허증이 느껴지는 데 몸은 반대로 무거워만 진다.
잠 못 들어 뒤척이는 밤 귀뚜라미 소리마저 쓸쓸함을 더한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허로운 빈 껍데기. 미풍이 스쳐도 훅 날아갈 것만 같은 팔십 인생. 내 어머니도 이런 밤들을 보내며 살다 가셨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민며느리로 시집을 온 어머니. 중년에 안질을 앓다가 잘못 먹은 음식으로 인해 실명을 한 할머니의 뒷바라지가 급했던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당신의 불행을 분풀이하듯 어린 며느리를 혹독하게 다뤘다. 고추당추보다 맵다는 그 시대의 시집살이. 할머니의 횡포는 광기에 가까웠다. 두툼한 손으로 머리를 만져주며 위로해 주시던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도망치고 싶었다.

열아홉 살 신랑은 객지로 떠돌다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나타났다. 그때마다 예쁜 머리빗이며 빛 고운 댕기 같은 걸 손에 쥐여주었다. 소녀는 그게 좋아서 할머니의 시집살이를 견딜 수 있었다나.
앞도 못 가누는 분이 쌀됫박을 들고 끼니때마다 쌀을 내주었다. 밥을 지으면 어머니의 몫은 없기 마련. 당연히 아버지가 밥을 덜어 주었다. 며느리 구박이었지만 당신 아들을 굶긴다는 생각은 못한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들이 가려고 옷이라도 갈아입으려면 어찌 그리도 귀가 밝은지 비아냥이 쏟아졌다.
“어이구 새 옷 입어봐야 네 년이 수탉 같을 게 뻔한데…. ”
마지막에는 심한 치매로 네년 밥 안 먹겠다고 추태를 부렸다. 결국에는 벽에 똥칠까지 하다가 흉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인생이 너무 안되었지만 우리 엄마가 더 불쌍했다.
“할머니가 벌 받으셨을 걸.”
우리들이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한마디씩 했다가 혼쭐나게 야단을 맞았다.
아버지의 따뜻한 위로가 어머니의 힘이었다. 종종 부부 다툼이 있을 때면 어머니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어린 걸 데려다가….”
아버지가 더 할 말을 잃고 돌아앉는다. 단번에 백기를 드니 다툼은 싱겁게 끝이 났다. 세상 남자들은 아내에게 다 그렇게 하는 줄만 알았다. 아버지가 특별한 분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내가 결혼을 한 다음이었다.
할머니를 모신 보상이라도 받듯 어머니의 중년은 따뜻했다. 아버지 사업이 잘 되는 게 어머니 덕이라고 늘 말했다.
“호박덩이 복덩이. 우리 마누라.”
1.4후퇴 때, 피난지에서 겪은 일이었다. 무서운 폭격도 잘 피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일곱 살 귀염둥이 동생이 홍역을 앓다가 얼굴에 검은 꽃을 피우며 죽어갔다.
섣달 대목에 꽁꽁 언 땅을 파고 동생을 묻었다. 어머니는 거의 실신 상태가 되어 언 땅을 뒹굴며 통곡했다.
그곳을 떠날 때 발이 땅에 붙어버린 어머니는 설움을 참느라 숨이 컥컥 막혔다. 파랗게 어린 소나무 가지 위에 얹힌 흰 눈이 눈부셨다. 흰 모자를 쓴 동생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 우리 ㅇ영이가 서 있네.”
어서 내려오라는 어머니의 손짓이 광적이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옛날 시어머님은 층층이 며느리 시집살이를 시켰다. 내가 당한 만큼 며느리에게 대물림하면서 위로를 받는 것이었을까. 바로 윗세대, 우리 어머니 세대가 제일 불쌍했다.
이제는 핵가족을 원하는 젊은 세대들 세상이 되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맞딱드린 노후 인생이 방황을 할 수 밖에 없다. 자식들 불편해 할까 봐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세상. 어머니는 쓸쓸했다. 그럼에도 티를 내지 않고 내 안위보다 자식들 잘되라고 빌고 다녔다.
“내가 큰집에서 죽으면 불교장을 해주겠지. 아마 셋째네서 죽으면 천주교장으로 해 줄거야.”
어머니는 늘 “속 썩이지 말고 너네나 잘살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내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이었다.
나는 참으로 불효한 자식이었다. 그분이 바라는 대로 예쁘게 살지 못했다. 모처럼 왔다가 가실 때의 뒷모습이 지금도 맘 아프다. 어머니가 인고로 시집살이를 견뎌냈듯이 딸도 잘 참고 살아가는 데 어머니의 마음은 안쓰럽다.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언니와 함께 달려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거칠어졌다. 언니는 거의 실신 상태로 목놓아 울었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맘 놓고 눈물을 쏟아내는 언니가 부러웠다. 나는 울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곡하는 언니가 부러웠다.
큰딸의 층층시하 시집살이가 고된 게 늘 맘이 아팠던 어머니. 딸들에게는 어머니 같은 시집살이를 안 시키겠다며 맏며느리 자리를 싫어했다. 그럴 때 이 작은 딸은 어머니 맘에 꼭 드는 착한 효녀였다.

여든다섯 해, 어머니 삶의 고통은 끝이 났다. 행복은 짧았고 고통은 길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지도 모른다. 입관할 때 보여준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꽃피는 아가씨의 형상처럼 너무 아름다웠다. “엄마”하고 부르면 방싯 눈을 뜰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그 모습을 잊지 않았다. 언젠가 어머니를 만날 땐, 꼭 그 모습일 것만 같다.
엄마! 다시 한번 불러보는 어~머~니.

글_수필가 오소영

오소영은 1937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 1998년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다. 1997년 회갑 나이에 <한맥문학> 수필 부문에 당선되어 늦깎이 수필가로 등단했다. 현재 여든 넘은 나이에도 교민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수필집 <13월의 바람꽃>, <언니가 오셨네>를 펴냈다. 무지개 시니어 중창단 총무 일도 맡아 하고 있다.

타임즈 인기글

‘투표가 최고의 심판’…여권 들고 투표장으로

말 많고 탈 많은 오클랜드한인회, 지금 이대로는 안 돼 타임즈의 눈 제15대 오클랜드한인회 선거가...

“이제까지 뉴질랜드에 이런 선거관리위원장은 없었다”

◉ 타임즈의 눈 선관위 운영 미숙으로 오클랜드한인회장•감사 선거 연기돼 제15대 오클랜드한인회장과 감사 선거가 6월...

리디아 고, 2019년 공로 훈장 받았다

리디아 고 특별 인터뷰 5월 15일 총독 관저에서 럭비 선수 대니얼 카터 등과 함께 뉴질랜드 한인 1.5세대 리디아 고(고보경)가 2019년 새해 공로 훈장을...

“하노이 정상회담은 2막…여러 막 거쳐야 대서사시에”

북한‘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에서‘완전히’에는 거부감 있어 지난 3월 17일(일) 뉴질랜드타임즈 도언태 발행인은 문재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를 맡은...

‘상식’도 ‘원칙’도 ‘소통’도 없는 ‘3무(無) 선관위’ 자초했다

◉ 타임즈의 눈 다음 선거 체계 있게 준비해 축제로 만들어야…한인들, 새 한인회장에게 적극 협조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