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칼럼 기획칼럼 양로원에 엄마를 밀어 넣고 도망친 딸

양로원에 엄마를 밀어 넣고 도망친 딸

“엄마! 사실은 그게 아니어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어요. 엄마를 버리다니요.
우리 엄마 안 버렸어요. 안 버렸다니까요.”

펑펑 울고, 또 울었다. 숨이 끊어질 듯이 울고 또 울었다. 길바닥 모퉁이에 쪼그린 채 퉁퉁 부은 눈 붙잡고 그렇게 울었다. 핸드백 속의 크리넥스 휴지도, 손수건도 다 써버렸다. 온통 눈물, 콧물로 뒤범벅된 얼굴, 목이 다 쉬었다. 오가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울고 있는 내게 관심은 없다. 그저 그들은 어디론가 목적지를 향해 바삐 스쳐 지나갈 뿐이다.
엄마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80 평생 병원 한번 가본 적 없는 건강 체질의 엄마였다. 다섯 남매를 두었다. 모두 집에서 낳았으니 병원에 갈 일이 없다. 하지만 가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 않은가. 엄마도 늙었고 병이 들었다.

난생처음 병원 응급실에 가던 날, 당장 심장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냥 집으로 간다면 그날 밤에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의사가 경고한다. 처음 보는 병원 풍경, 수술기구, 의사, 간호사, 주삿바늘, 이 모든 것이 그에겐 낯설고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날 그렇게 급히 심장 수술을 받고 뇌에 쇼크가 일어났다. 의학용어로 ‘섬망’(딜레리운, Delirium).
인자하고 온순한 성품의 소유자 엄마는 누구와도 다툰 적이 없다. 시어머니와 다른 동서들하고도 물론, 우리가 자랄 때도 한 번도 야단친 적이 없다. 그런데 섬망이란 쇼크가 온 이후 성품이 많이 달라졌다. 주삿바늘도 다 빼버리고, 소리를 지르고, 이유 없이 반항하는 등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이런 상태의 엄마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 90세가 다 된 아버지가 엄마를 돌볼 수가 없다. 세 명의 딸들은 뉴질랜드, 호주에 살고 있고 24시간 누군가 돌봐야만 됐다.
수술 후 임시 퇴원하여 엄마가 살던 집으로 모셔놨을 때 나는 엄마를 만나러 한국에 나갔다. 이즈음 내 남편도 위독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노스쇼어 병원에 입원을 시켜 놓고 의사의 허락을 받아 엄마를 보러 갔다.
“네 일도 바쁠 텐데…어떻게 나왔느냐? 너의 남편 건강은 어떠냐? 뉴질랜드 애들은 모두 잘 있느냐?” 엄마는 그렇게 반가이 맞아주었지만, 더 이상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술 후 받은 뇌의 충격 때문이다.
“엄마 밥해 드리려고 잠깐 나왔어요. 제가 한국에 오래 있지는 못해요. 로이 윌슨 씨도 많이 아파서 병원에 있어요.”

엄마를 떠나 산 세월이 50년도 넘었다. 금산 여자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엄마와 살았다. 그때는 내가 어렸고, 공부만 하기도 바빴다. 그러다가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 40년을 살았다. 한 번도 내 손으로 밥을 지어드린 적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우리 아이들을 낳고, 키우고 살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때 엄마를 보러 갔을 때 처음으로 엄마와 단둘이서 딱 일 주일을 함께 산 게 전부다.
‘어떻게 밥을 해드려야지? 참! 치아도 모두 의치라고 했지. 그럼 밥할 때 물을 많이 부어서 죽처럼 해야겠네. 반찬은 물렁물렁하게 해야겠지.’
진수성찬은 아니었지만, 잇몸으로라도 드실 수 있도록 잘게 다지고, 사이사이 약도 드리고. 순한 아기처럼 잘 받아 드신다.
“경숙아 네 손에 밥 얻어먹으니 참 좋다.
너 뉴질랜드 언제 들어가니? 조금 더 있을 수 없겠냐?”
마냥 내가 서울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남동생이 분당의 어느 양로원을 찾아 냈다. 그 자리도 놓칠까 봐 바로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난 사실대로 털어놓고, 양로원에 모신다고 말하자고 했지만 절대로 엄마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자기 친한 친구 집에 임시로 모신다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엄마한테 밥을 지어드린 지 일주일 만에 엄마를 모시고 그 양로원에 들어가는 날이 다가왔다. 우리가 도착한 그 양로원에는 늙고 병이 든 노인들이 눈만 뻐끔뻐끔하며 나란히 앉아있었다.
순간 엄마의 낯빛이 변했다. 뭔가 낌새를 챈 것이다.
“웬 노인들이 저렇게 많니? 여기가 어디냐?”
남동생이 내게 귀띔한다.
“누나 살짝 빨리 나가. 여기 싫다고 엄마가 따라 나올 테니까. 내가 여기 직원들에게 맡기고 나갈게.”
떠미는 동생의 말에 엉겁결에 양로원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창피함도 없었다.
엄마가 그곳에 잘 적응하도록 초기에는 자주 방문을 삼가라고 한다. 그 뒤 양로원 원장이 엄마의 상태를 전화로 알려왔다. 집에 간다고 날마다 옷 보따리를 싸고, 또 풀고, 또 싸고.

핸드백을 손에 든 채, 잠겨진 문 앞에 서서 온종일 서 계신다고 한다. 더운 여름이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행여 자식들이 오면 빨리 따라 나가려고 서 있는 거란다. 아들, 며느리, 손자, 남편도 다 당신을 그곳에 버렸다고 한다. 뉴질랜드서 온 맏딸 경숙이도 엄마를 그렇게 버렸다고 한다. “엄마! 사실은 그게 아니어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어요. 엄마를 버리다니요. 우리 엄마 안 버렸어요. 안 버렸다니까요.”

변경숙_뉴질랜드 이민 40년 차 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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