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NZ교민뉴스 교민뉴스 “남과 북이 통일되어 한 나라로 살면 참 좋겠어”

“남과 북이 통일되어 한 나라로 살면 참 좋겠어”

1.5세대 기자, 한국전쟁 참전 용사(K-Force)를 만나다

한국전쟁은 내 삶에 일어난 최고의 일…한국 사람들은 모두 내 친구

‘6월은 호국(護國) 보훈의 달’, 한국 사람이라면 아주 익숙한 말이다. 6일은 현충일(뉴질랜드 안작 데이)이고, 25일은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다. ‘호국 보훈의 달’ 6월을 맞아 1.5세대 이송민 기자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키위 할아버지 월리 와이엇트를 만났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아주 소중한 분이다. <편집자>


‘K-Pop’, ‘K-Food’, ‘K-Culture.’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도 K-Pop 춤을 추는 고등학생들이나 한인 식당에서 K-Food를 즐기는 외국 사람들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어떤 단어든지 앞에 ‘K’를 붙이면 ‘한국적’인 게 되는 시대.

‘K-Force’, 한국전쟁에 참전한 NZ 연합군

혹시 ‘K-Force’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K-Force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뉴질랜드 연합군을 뜻하는 말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은 연합군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뉴질랜드도 연합군에 합류, 4700여 명의 뉴질랜드 군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뉴질랜드는 전사자가 45명, 부상자가 80여 명이 발생하는 고귀한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70년이 거의 다 되어 가는 현재, 뉴질랜드에 생존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평균 나이는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이다.

- Advertisement -

한국전쟁 참전용사 중 제16연대 소속이었던 월리 와이엇트(Wally Wyatt, 1928년 4월 23일 생).

인터뷰를 위해 그의 집에 들어설 때부터 집을 나올 때까지 ‘한국 사랑’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월리의 집 곳곳에는 한국 전통 부채부터 한국 관련 책들, 한국에서 찍은 사진과 교민들과 찍은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월리는 스물셋에 한국전쟁에 참가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뉴질랜드는 유엔 연합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지만, 그 당시 뉴질랜드에서는 해외에 파견된 군인이 없었다.

모집 공고 엿새 만에 12000여 명 지원

“엿새 만에 12000여 명이 지원했어. 그 당시 뉴질랜드 젊은이들의 상황은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

월리 와이엇트는 학교를 마친 후 자신의 꿈을 찾지 못한 채 4년을 방황하며 직장을 옮겨 다녔다. 자신이 뭘 바라는지 몰랐기 때문에 농사일이나 소 젖 짜는 일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한국전쟁 군인 모집 공고를 보고 참가 신청을 했다. 그저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1100여 명의 군인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4 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전쟁 당시 추억들이 많지만,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기억이 흐려져.”

월리 와이엇트는 3년을 한국에서 복무했다. 다른 참전용사들과 함께 유엔군을 도와 부산을 지켰다.

전쟁 중 월리가 맛본 ‘운 좋았던 날’.

한 병장이 뉴질랜드로 귀국하게 되면서 그다음 날 월리가 병장으로 진급한 것이다. 한국전쟁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전환점이었다. 월리는 전쟁 당시에 관해 많은 걸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기억이 흐릿해서 그랬는지 말을 아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은 휴전을 맞았다. 따져 보면 기약도 없는 날이 되고만 슬픈 날. 그 날은 월리의 기억에 뚜렷하게 새겨진 것 같았다. 날짜 얘기를 할 때마다 ‘7월 27일을 언급했다.

“뉴질랜드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우리에 관해서 별로 알려고 하지 않았어.”

전쟁 끝난 뒤 환영해 주는 사람 거의 없어

7월 27일의 휴전 선포는 참전용사인 월리에게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일부만 남고 대부분의 군인은 뉴질랜드로 돌아왔다. 월리 또한 3년간의 복무를 끝마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환영해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클랜드 서쪽 훼누아파이(Whenuapai) 군 기지에서 그저 각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통보만 받았다. 모든 병사가 적어도 18개월을 뉴질랜드를 비운 상태였지만, 그 어떤 환영식이나 다시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 전혀 없었다. 마침내 여섯 달이 지나자 환영식이 열렸다.

“뉴질랜드에서는 한국전쟁이 잊힌 것처럼 느껴졌어.”

그의 안타까운 말에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을 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반성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내 삶에 일어난 최고의 일이었지.”

많은 사람이 전쟁으로 희생을 당했지만, 월리에게 있어 한국전쟁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휴전이 된 뒤 월리는 데본포트(Devonport) 집으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둔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먼저 뉴질랜드로 돌아온 그의 오랜 친구이자 전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니까 오라는 것이었다. 그 파티에 참석했다. 거기서 학교 후배가 데리고 온 영국 여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때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지. 한국전쟁이 끝나고 2년 뒤 결혼했어. 이 모든 게 한국전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아내를 만나지 못했을 거라고 얘기하는 그는 ‘사랑꾼’이었다. 또한 한국전쟁 덕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월리. 한국전쟁을 현재의 존재 이유로 삼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연단이 그에게 소망이 된 셈이다.

25년간 참전용사 연결하는 소식지 만들어

결혼 후 월리는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동시에 ‘K 포스 디스패치 뉴스레터’(K-Force Dispatch Newsletter)의 편집자로 25년을 봉사했다. 뉴질랜드가 작은 나라지만 참전용사들이 다 흩어져 살아 서로 계속 연락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소식지를 만들었다. 그의 집안 곳곳에 있는 사진 앨범을 보면서 월리는 ‘역사의 증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역사를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전 세계에 한국이 얼마큼 잠재력이 큰지 보여줬다고 생각해.”

월리는 한국을 네 번 다녀왔다. 첫 방문 때 본 한국의 발전에 “매우 놀라웠어”라고 말했다. 1953년 뉴질랜드로 떠날 때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됐는데, 1984년 방문했을 때는 많은 개발이 이뤄져 있었다.

그는 1998년 두 번째로 한국을 다녀왔다. 그때는 건물들이 더 화려해졌다고 표현했다. 2001년 그는 한국전쟁 당시 머물렀던 부산을 찾아갔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을 방문했고, 뉴질랜드에 있을 때는 한인들과 자주 소통했다.

“남과 북이 통일되어 한 나라로 살고 평화가 한국 땅에 찾아왔으면 참 좋겠어.”

월리는 한반도 상황에 관심이 늘 높다. 참전용사들이 모일 때마다 한반도에 관해 얘기를 한다고 했다. 그들은 모두 이른 시일 안에 대한민국에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다고 전했다.

사실 월리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한국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했고, 잘 모르는 어떤 나라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그저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그 행함이 꿈이 없던 청년 월리에게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에게 역사를 알려주며 위로와 공감을 주는 사람으로 그를 만들어갔다.

시간 내 한국 관련 책 읽고 사진 정리해

그는 틈틈이 시간을 내 집에서 한국 관련 책을 읽으며, 사진들을 정리한다. 집안 곳곳에는 교민들과 찍은 사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 또한 월리를 한인 행사에서 자주 만나고는 했다.

“한국 사람들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월리가 단숨에 답했다.

“나는 한국 친구들이 많아. 한국전쟁 때는 한국말을 할 줄 몰라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지. 뉴질랜드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잘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어. 모두 다 내 친구지.”

밝은 웃음으로 답을 한 그가 강조한 건 “한국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점. ‘친구’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가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장소와 인종을 넘어 ‘연합군’,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한국으로 떠난 월리. 인터뷰 내내 계속해서 7월 27일을 떠올리던 그는 그만큼 전쟁의 끝을 바라고 있었던 거라고 믿는다. 지금도 그는 한반도의 전쟁 위기가 그치기를 꿈꾸고 있다. 한국을 사랑하는 이런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윌리와 같은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한국을 향한 사랑이 헛되지 않도록 조금 더 한국이라는 나라와 해외 동포 공동체를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과 세계 곳곳의 한인 공동체에 분쟁과 분열보다는 참전용사들의 정신인 평화와 하나 됨이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노병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오랫동안 기억될 뿐이다.”

                                              이송민_기자

저작권자 © ‘뉴질랜드 정통교민신문’ 뉴질랜드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Advertisement -

타임즈 인기글

‘투표가 최고의 심판’…여권 들고 투표장으로

말 많고 탈 많은 오클랜드한인회, 지금 이대로는 안 돼 타임즈의 눈 제15대 오클랜드한인회 선거가...

“김우식 선관위, 한인회 돈이 그렇게 우스웠나”

◉ 타임즈의 눈 ‘15대 선거 비용 정산서 내부 감사 보고서’를 읽고 14대보다 $15067 더...

“이제까지 뉴질랜드에 이런 선거관리위원장은 없었다”

◉ 타임즈의 눈 선관위 운영 미숙으로 오클랜드한인회장•감사 선거 연기돼 제15대 오클랜드한인회장과 감사 선거가 6월...

리디아 고, 2019년 공로 훈장 받았다

리디아 고 특별 인터뷰 5월 15일 총독 관저에서 럭비 선수 대니얼 카터 등과 함께 뉴질랜드 한인 1.5세대 리디아 고(고보경)가 2019년 새해 공로 훈장을 받았다....

“하노이 정상회담은 2막…여러 막 거쳐야 대서사시에”

북한‘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에서‘완전히’에는 거부감 있어 지난 3월 17일(일) 뉴질랜드타임즈 도언태 발행인은 문재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를 맡은...
error: 뉴질랜드 타임즈는 웹사이트의 모든 내용에 대하여 무단 복제를 금지합니다. 링크 또는 SNS 공유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