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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늙은이의 소망

“우리말 잘 간직하는 일이 우리의 혼을 붙들어 두는 것”
주변 환경 어려워도 우리의 얼 지키는 길 반드시 있어


내 나이 고희를 넘었다. 물 좋고 공기 맑은 먼 나라로 이민을 와서 20년을 넘게 잘 살았다.

농사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작은 농장을 하면서 고향 생각을 다독이며 잘 버텨 왔다. 같이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이제 몇 명이 남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지나온 세월은 까마득한데 살아야 할 날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마 바람이 있다면 손주 두 놈이 이 낯선 땅에서 한국의 얼을 지니고 잘살았으면 한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 우리의 것에 더 관심이 간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동네에서 하는 장구반에 들어 우리 가락에도 푹 빠졌다. 저 윗대에서 우리에게 물려 준 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꼭 전하고 가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혼이 날아가 버리는 것을 붙들어 주는 그물 같은 것이 있다고 했다. 바로 ‘민족성, 언어, 종교’라고 했다. 우리말을 잘 간직하는 일이 우리의 혼을 붙들어 두는 것이라고.

말의 중요성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잘 알고 있다. 우선 각 민족은 그 민족들의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 언어의 차이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과는 구별되는 특이성 즉 고유한 문화를 가진다.

날마다 쓰고 있는 말은 저 먼 조상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거기에는 온갖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경험들도 녹아 들어간다. 우리의 언어 속에 우리의 정신세계와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우리말이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얼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다.

김수영 시인은 어머님으로부터 배운 말이 그가 시를 쓰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우리말을 지키고 이를 후손들에게 전하는 몫은 오롯이 어머니 즉 여인들의 몫이다.

자칫 방심하면 영어의 우위 속에서 우리말이 소멸해 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이민 초기 중국인 아버지와 아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대신 영어는 아주 유창하게 구사하는 걸 보면서 참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중국 사람이 중국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민 1세대 2세대 3세대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 우리에게도 중국인의 경우와 같이 그런 일이 생겨 날 수도 있다. 현명한 조선의 여인들은 밖으로 키위 문화에 잘 동화하고 안으로 우리의 주체성인 민족정신을 굳세게 갈고 닦아 나갈 것이라 믿는다.

외국에 살면서 어머니 말을 잊지 않고 이를 간직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오천 년을 이어 온 우리의 역사를 지키는 일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이 있었고 이러한 난관을 뚫고서 오늘에 이르렀다. 돌이켜 보면 이 기적 같은 일에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역에서 “호랑이  꼬리를 밟아도 물리지 않는 수가 있다”고 했다.

주변 환경이 어렵더라도 우리의 얼을 지켜 내는 길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날마다 같이하는 밥상머리에서 ‘한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이민을 와서 이러 저러하게 살아왔다는 이야기와 함께 일연 스님의 단군신화도 들려주면 좋은 역사교육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가 살아왔던 거대한 뿌리를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도록 자꾸 그쪽으로 이끌어야 한다. 우리의 자손들이 우리말을 잘하고 김치와 된장국을 즐겨 먹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 스마트 폰보다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튼실한 청년으로 자랐으면 하는 게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다.

구춘수_시인

◼︎외부 필자의 글은 뉴질랜드타임즈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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