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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5) 옛날 영화

작업실(필명)-
스콜라문학회 회원

그날도 단성사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소방서 건너편 어느 지하 다방으로 들어간 저는
레지가 가리키는 대로 찰싹 붙어 앉은 한 쌍의 바퀴벌레와 합석했고,
선불을 내고 커피를 주문했고, 담배 연기로 도넛 다섯 개를 만들었고,
엽차를 한 잔 더 달라고 하여 레지를 귀찮게 했고,
카운터 아가씨 몰래 테이블 위에 늘어진 등갓에 담뱃구멍 두 개를 뚫었고
시끄러운 팝송과 담배 연기 속에 죽치고 앉아 있는 여자들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애인을 비교했습니다.


한국 여행 중에 정말 특이한, 아니 특별한 분을 만났습니다. 서 작가의 친구 중 한 분이었고, 무등산 게장 정식을 함께 먹고 난 후 카페에서 환담을 나눌 때였습니다. 카페에는 주인의 취향이, 어쩌면 이루지 못한 꿈의 부스러기일지도 모를 사진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벽에 붙은 옛날 영화의 스틸 사진들을 둘러보더니, 어느 한 장을 가리키며 무슨 영화인지 아느냐고 모두에게 물었습니다. 무성영화가 아닐까 하는 그래서 약간은 희극적으로 보이는 사진이었습니다. 모두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소파에 등을 부리려고 할 때였습니다.

“으음, 1930년대 맥베스의 한 장면인데 그 남자 배우는 로렌스 올리비에야.”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고, 확인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서 작가가 그 친구를 소개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영화에 심취해왔으며, 꽤 조예가 깊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레 화제는 영화 이야기로 돌았고, 그 친구가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수많은 영화 중에 그래도 가장 잘 된 영화는 뭐니 뭐니 해도 대부(代父)야. 그중에서도 알 파치노가 애송이로 나오는 일편 말이야.”

다들 대부에 빠져들었습니다. 갑자기 말론 브랜도처럼 다리를 꼬았고, 검지를 뻗어 한 방 쏘았고,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습니다.

문득, 알면 얼마나 알까 하는 심술이 피어올랐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럼, 아웃 오브 아프리카도 보셨습니까?”

제 또래치고 그 영화를 본 사람은 별로 없었거든요. 워낙 재미가 없어서지요.

그 친구는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습니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출연했고요. 감독은 시드니 폴락이었습니다. 첫 장면의 첫 대사가 아마,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 그런 내용일 겁니다.”

저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습니다. 주연배우와 감독까지는 인정하겠는데, 첫 장면의 첫 대사라니요.

박 선생의 책방에 갔습니다.

벤또로 점심을 먹고 자리를 옮겨서 커피를 마시는데, 어디서 귀에 익숙한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라는 영화의 OST였습니다.

알랭 드롱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쟝 가방과 함께 권총을 들고나오는 것처럼, 카우보이로 본전을 다 뽑아먹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라디오 음악프로 디제이로 나오는, 각진 레이밴 선글라스를 쓰고, 지붕 없는 자동차를 운전하여 석양 무렵의 태평양 해안도로를 달릴 때 깔리는 음악이었습니다.

낮은 톤의 여자 가수가 부른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라고 기억됩니다.

그때의 저는 일찍이 왕유의 외팔이 시리즈와 이소룡과 성룡을 거친 후였고, 괜스레 눈썹 사이에 내 천자를 그리며 두껍고 무거운 에밀의 양장본을 옆구리에 끼고 다닐 때였고, 용돈을 쥐어짜 가며 러브 스토리, 위대한 개츠비, 태양은 가득히, 아웃 오브 아프리카 들을 찾아다니던 때였습니다.

그날도 단성사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소방서 건너편 어느 지하 다방으로 들어간 저는 레지가 가리키는 대로 찰싹 붙어 앉은 한 쌍의 바퀴벌레와 합석했고, 선불을 내고 커피를 주문했고, 담배 연기로 도넛 다섯 개를 만들었고, 엽차를 한 잔 더 달라고 하여 레지를 귀찮게 했고, 카운터 아가씨 몰래 테이블 위에 늘어진 등갓에 담뱃구멍 두 개를 뚫었고, 시끄러운 팝송과 담배 연기 속에 죽치고 앉아 있는 여자들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애인을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빨랫비누로 초벌 감고 여동생이 감추어둔 샴푸로 헹군 머리카락을 힘껏 젖혀 보이고 어깨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며 다방을 빠져나온 저는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헤아리며 지하철역으로 걸어갔습니다. 땅콩과 군밤, 오징어를 구워 파는 노점의 카바이드 불들이 켜지고 있었고, 저는 혼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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