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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운의 동유럽 여행] 프라하의 봄, 얀 팔라흐와 귀 먼 작곡가

석운의 동유럽 여행(2)

스메타나 대표작 ‘나의 조국’(Ma Vlasta) 체코 사랑과 희망 노래해

프라하 여행 사흘째 되는 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바츨라프 광장이었다. 프라하의 신시가지를 대표하는 이 광장은 맨 위에 있는 체코 국립박물관으로부터 아래로 뮤스텍 광장까지 이어지는 길고 넓은 대로이다.

지금은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로 변모하여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멋진 건물과 상점들이 화려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지만 이 광장은 체코의 슬픈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곳이기도 하다.

아침 일찍 이곳을 찾은 이유는 지금부터 50여 년 전에 이 광장에서 벌어졌던 ‘프라하의 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프라하의 봄, 1968년 민주화 운동 절정

오늘의 체코는 잘 보존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모습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평화로운 나라이지만 그 뒤안길에는 슬픈 역사가 숨을 쉬고 있다. 주변 강대국들의 침공으로 언제나 숨을 죽이고 살아왔던 나라가 체코다. 세계대전 이전에는 독일 점령하에 있었고 그 뒤에는 구소련 치하 공산정권의 압제 아래 있었다.

그러다가 1968년 온건파 정치인 두브체크가 서기장이 되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강령에 따라 언론, 출판, 집회 및 국내외 이주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스탈린 치하 23년(1945~1968) 만에 봄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이를 가리켜 ‘프라하의 봄’이라고 한다.

체코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대단하였고 지식층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운동이 시작되어 1968년에는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날마다 수만 명의 인파가 집회를 연 곳이 바로 이곳, 신시가지의 중심인 바츨라프 광장이었다.

얀 팔라흐, 나라를 위해 몸을 불사른 청년

그러나 소련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군대를 보내어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시민들의 염원은 무참히 짓밟혔고 프라하의 봄은 꽃도 못 피우고 사라져버릴 운명이었다. 시민들은 계속 저항했고 1969년 1월에 대학생이었던 얀 팔라흐가 소련의 침략에 맨몸으로 저항하는 뜻으로 프라하의 이 바츨라프 광장 위쪽 국립 박물관 앞에서 분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오래전이지만 얀 팔라흐가 나와 같은 1948년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찌르르하고 아픈 통증을 가슴에 느꼈다. 비록 태어난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꼈다.

대학생이었던 그가 분신으로 목숨을 나라에 바친 1969년에 나도 대학생이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그때 간간이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데모에 참가하여 구호를 외치기도 했지만 나라의 미래보다는 내 미래를 위해 매일을 보내던 지극히 이기적이고 평범한 젊은이의 하나였다.

나라를 위해 맨몸으로 싸우다 드디어는 젊은 목숨을 불태워버린 동갑내기 얀 팔라흐의 삶에 비할 때 나의 삶은 너무도 부끄러운 것이었다. 젊은 시절 느꼈던 그 부끄러움이 이 아침 바츨라프 광장을 찾는 나의 가슴 속에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광장 위쪽에 얀 팔라흐와 그가 죽은 뒤 약 한 달 뒤 그를 따라 같은 장소에서 분신한 대학생 얀 자이츠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있다. 이들의 거룩한 희생에 힘입어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1989년에 민주화 시민혁명이 다시 일어나 공산 독재체제가 무너졌다. 아무런 유혈 충돌 없이 부드럽게 진행된 혁명이었기에 ‘벨벳 혁명’이라 불리는 이 혁명에 모두가 모여 한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던 장소도 바로 이 바츨라프 광장이다.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그들의 추모비 앞에 섰을 때 나의 눈길은 자연스레 얀 팔라흐의 생년월일에 멈췄다. 1948년 8월 11일생. 오래전 맨 처음 그와 내가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통증과 부끄러움이 다시 떠올랐다. ‘아아,’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작은 신음을 흘렸다. 저 시대에는 어떻게 저렇게 젊은 이십 대의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까 생각하는 순간 언젠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보았던 윤봉길 의사의 시구(詩句)가 떠올랐다.

그는 일제식민지 아래에서 엎드려 살기보다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1930년 22살의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1932년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에 큰 손실을 입히고 24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기회를 택했던 우리 한국의 의로운 젊은 혼이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 프라하의 또 다른 젊은 혼 ‘얀 팔라흐’의 추모비 앞에 선 내 가슴으로 들어왔나 보다.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가슴이 아팠다. 머리가 허옇다 못해 빠질 때까지 긴 목숨을 부지(扶支)하기에 급급해하며 살아온 나의 삶이 다시 부끄럽게 머리를 눌렀다. 더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체코 민족음악의 창시자

바츨라프 광장을 떠나 우리가 찾은 곳은 체코가 사랑하는 음악가 스메타나의 동상이었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1824~1884)는 체코 민족음악의 창시자이다.

스메타나 당시의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스메타나가 24살이었던 1848년에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에 눈을 뜬 프라하의 시민들이 일어나 항거운동을 벌였고 스메타나도 결연히 이 투쟁에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뜨거운 민족의식으로 체코 음악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음악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음악 속에는 체코의 역사, 전설, 민속이 들어있고 아름다운 체코의 풍경이 흐른다. 이런 스메타나이기에 그는 체코 사람 모두의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받는 음악가이다.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의 가장 유서 깊은 명소는 블타바강(Vltava River: 독일어로는 Moldau)을 가로지르는 카렐(Charles Bridge) 다리다. 체코뿐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제일 아름답다는 카렐 다리에서 멀지 않은 강 언덕 경관이 좋은 곳에 스메타나의 박물관이 있고 그 앞에 강을 바라보며 스메타나의 동상이 서 있다.

그의 동상이 이 강변의 가장 좋은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대표작 ‘나의 조국(Ma Vlast)’ 때문일 것이다. 모두 6곡의 교향시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스메타나가 뜨거운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고취되어 작곡한 곡이다.

6곡 모두에 제목이 붙어 있는 이 교향시는 곡 전체에서 보헤미아의 빛나는 전통과 아름다운 자연이 넘나든다. 스메타나는 이 곡을 통해 조국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노래했다.

6곡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곡이 두번 째 곡 블타바 강(=몰다우 강)이다. 이 곡을 들으면서 체코 사람들은 지난 역사에 대한 향수와 조국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였다. 이렇게 사랑 받는 곡이고 또 이렇게 사랑 받는 음악가이기에 프라하에서 매년 5월에 열리는 세계적인 음악 축제 ‘프라하의 봄’은 스메타나의 대표작 교향시 ‘나의 조국’이 공연되므로 그 화려한 막을 올린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기회를 택했던
우리 한국의 의로운 젊은 혼이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 프라하의 또 다른 젊은 혼 ‘얀 팔라흐’의 추모비 앞에 선 내 가슴으로 들어왔나 보다.
‘장부출가 생불환’이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머리가 허옇다 못해 빠질 때까지 긴 목숨을 부지(扶支)하기에 급급해하며 살아온
나의 삶이 다시 부끄럽게 머리를 눌렀다.


음악으로 울리는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에 독립을 축하하고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창단 50주년을 기념해 시작되었다. 체코가 정치적인 격동을 거치는 동안에도 이 축제는 계속되었고 1952년부터는 스메타나의 서거일인 5월12일부터 시작되어 6월 초까지 약 3주 동안 열린다.

개막과 폐막은 프라하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시민회관 내의 스메타나 홀에서 열린다. 해마다 열리는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에서 울려 퍼지는 ‘나의 조국’을 들으며 체코 사람들은 조국애를 다짐하며 또 그들이 사랑하는 음악가 스메타나를 추모한다.

우리가 스메타나를 찾은 날은 마침 스메타나 박물관이 휴관이어서 아쉽게도 들어가지 못했다. 마음만 급했지 충분히 일정을 검토하지 못한 것을 자책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스메타나의 동상 앞으로 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무성하게 자라 그의 얼굴을 가린 버드나무 잎사귀 사이로 그는 동양에서 온 작은 노인의 눈인사를 부드러운 눈길로 받아 주었다.

동상 옆으로는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블타바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 강물을 바라보는지 아니면 동상 주변으로 계속 몰려드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지 그의 눈가엔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오늘 당신 생각을 하면서 음악을 들을 거요’

‘안녕하시오, 스메타나 선생. 당신은 날 몰라도 난 당신을 잘 알고 있소. 당신의 음악 그리고 당신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난 너무도 좋아하오.’

어느새 나는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그가 말년에 완전히 청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점점 들리지 않는 귀를 붙잡고 그는 얼마나 고뇌했을까? 그러나 그는 가혹한 운명을 딛고 작곡을 계속했고 불후의 걸작 ‘나의 조국’을 탄생시켰다. 다시 고개를 들어 쳐다본 그의 얼굴에서 조금 전에는 못 느꼈던 슬픔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그날 저녁 스메타나 홀에서 열리는 ‘프라하의 봄’ 음악회 표를 꺼냈다. 프라하에 오기 전 미리 구매해 놓은 표였다. 나는 표를 든 오른손을 높이 들어 그에게 흔들었다.

‘이거 보시오, 스메타나 선생. 내 말은 안 들려도 이 표는 보이지요? 오늘 당신 생각을 하면서 음악을 들을 거라오!’

듣지 못하는 스메타나에게 나는 손짓으로라도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뭐 하세요, 사람들이 쳐다봐요’하면서 옆에 있던 아내가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아내의 손을 잡으며 나는 눈짓으로 스메타나에게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뒤돌아서 카렐 다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블타바강을 끼고 걸어가는 내 머릿속으로 플루트의 선율이 흘렀다. 분명 교향시 ‘블타바 강’의 첫머리를 여는 아름다운 플루트 소리였다.

글과 사진_석운
화요음악회 운영자, 오클랜드 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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