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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운의 동유럽 여행] 슈베르트 무덤에 장미꽃 한 다발을 바치다

석운의 동유럽 여행(3)_다시 찾은 비엔나

음악의 도시 곳곳에 음악가 자취 풍겨…‘하늘의 피아노 연주’ 황홀해

10년 전 비엔나에 왔을 때 이 도시의 매력에 푹 빠졌다. 며칠간의 짧은 여정을 마치고 비엔나를 떠나면서 반드시 다시 오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유럽의 도시 중에는 비엔나 못지않게 훌륭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 많았지만 유독 비엔나에 그렇게 애착이 갔던 이유는 이 도시에서만 만날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들의 삶의 자취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엔나는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음악가들의 생애가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동네공원에 슈베르트의 동상이?

그때 시내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들렸던 어느 공원에서 슈베르트의 동상을 발견하고 흥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니 동네공원에 웬 슈베르트가?’

동상 가까이 가서 ‘FRANZ SCHUBERT’라고 새겨진 그의 이름을 쓰다듬듯 확인했다. ‘과연 음악의 도시답게 동네공원에도 슈베르트의 동상을 세워 놓았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저쪽에도 동상이 있나 봐요”라고 했다. 가보니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입상(立像)이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동상이었다.

왈츠의 도시 비엔나를 웅변하듯 그의 동상은 아름다운 무대 위에 화려하게 서 있었다. 그제야 우리는 그 공원이 범상한 동네공원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비엔나가 사랑하는 여러 인물의 동상을 만났다. 그중에 음악가의 동상은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프란츠 레하르(헝가리 작곡가)였는데 아내가 “이분 금과 은 작곡가잖아요”하면서 찾아냈다.

비엔나 시민공원, 원래는 귀족들 사교장

“와, 당신 굉장하네”하고 내가 추어주자 아내는 “나도 뭐 좀 안다고요”하면서 어깨를 으쓱하여 한참 웃었다. 그리고 안톤 브루크너(오스트리아 작곡가)의 흉상은 내가 찾았다.

보통의 애호가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브루크너와 같은 작곡가의 동상도 공원에 세워놓은 비엔나 시민들의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무심코 발길이 머물렀던 이 공원이 비엔나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식처의 하나인 시민공원(Stadpark)이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이번에 비엔나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당연히 시민공원이었다. 이곳은 원래 귀족들의 사교 장소로 사용되던 장소였지만 19세기 중반에 링 도로(Ringstrassen)를 재정비하면서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만들어졌기에 이름도 시민공원(Stadpark)이다.

비엔나에 오면 링 도로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이를 이해하려면 서울의 사대문(四大門)을 생각하면 된다. 서울이 사대문을 중심으로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곽을 쌓았고 성곽 안이 자연스레 생활의 중심이 되었듯 비엔나에도 비슷한 성곽이 있었다.

비엔나의 옛 지도를 보면 성 스테판 대성당(St. Stephen’s Cathedral)을 중심으로 다각형의 성곽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곽의 필요가 없어지자 성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넓은 도로를 만들었는데 링(Ring,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졌기에 ‘링 도로’라고 부른다. 링 도로는 꽤 넓어 그 위로 1960년대 서울의 전차와 같은 트램(tram)이 다닌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슈베르트

공원 입구를 지나면서 나는 10년 전의 감회가 다시 살아났다. “슈베르트 선생께 먼저 갑시다”라고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라고 아내가 웃으며 답했다.

지난 7년간 우리 집에서 매주 화요일에 열리는 작은 음악 모임에서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내가 회원들에게 비엔나의 슈베르트 동상 이야기를 하면서 꼭 다시 찾아갈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아내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슈베르트를 독일의 음악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만 그는 온전한 비엔나 사람이다. 1797년에 비엔나에서 태어나 1828년 31살의 젊은 나이로 비엔나에서 죽었다. 그 짧은 삶 동안 비엔나를 순수하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웠다. 그런 슈베르트이기에 비엔나 사람들은 그가 죽은 지 44년밖에 안 지난 1872년에 동상을 세웠을 것이다.

비엔나에서 보낸 그의 삶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아름다운 음악은 영원하기에 1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는 이 공원에 동상으로 우뚝 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슈베르트는 그 자리에 있었다. 10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또 무슨 악상이라도 떠올랐는지 눈길은 꿈을 꾸듯 허공을 바라보며 오른손에는 펜을 들고 무릎 위에는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다.

나는 한참을 그의 앞에 서서 꿈꾸는 듯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영감이 또 떠올랐소? 어떤 노래를 지금 또 준비하고 계시오?’하고 나는 독백하듯 그에게 중얼거렸다. 마침 한줄기 작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 따라 실려 오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아주 느릿한 첼로 소리였다. ‘슬픔에 의해 작곡된 음악만이 가장 사람을 즐겁게 만들 수 있다’라고 한 그의 말대로 슬픔이 배어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의 기쁨의 심지를 건드리는 선율이었다. 그의 작품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의 첫 도입부였다.

아르페지오네.

고맙소, 슈베르트 선생. 노래의 꽃 잘 받았소.
평생 가슴에 담고 살겠소.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하오. 언제 또 만날지 기약할 수가 없소.
선생이 그렇게 흠모하던 베토벤 선생 옆에 계시니 편안히 쉬시오.


아르페지오네, 슈베르트 운명처럼 단명한 악기                    

아르페지오네(Arpeggione)라는 악기는 슈베르트 시절에 잠깐 생겼다 없어진 악기다.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단명할 비운의 악기였기에 슈베르트는 이 악기를 그렇게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 악기를 위해 쓴 곡이 그 유명한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다. 슈베르트가 작곡한 이 곡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늘 이 악기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이 곡은 아르페지오네 대신 주로 첼로로 연주된다. 좋은 연주가 많지만 가장 훌륭한 연주는 브리튼의 피아노에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연주다. 이 두 사람의 연주를 좋아해 나는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날 동상 앞에서 들리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첼로는 분명 로스트로포비치지만 피아노는 슈베르트라고 생각했다. 그를 사랑하여 멀리 뉴질랜드에서 10년을 벼르다가 날아온 나를 위해 오늘 슈베르트가 손수 피아노 앞에 앉았을 것이었다. 너무 가난해서 평생 자기 피아노를 가져보지 못한 이 천재가 오늘 나를 위해 하늘의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고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속으로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곡은 어느덧 아다지오의 2악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슬픔과 희망이 교차하듯 첼로와 피아노가 갈마들며 슈베르트 특유의 비장한 선율을 빚어냈다.

‘고맙소, 슈베르트 선생. 오클랜드에 돌아가면 오늘의 이 감격을 꼭 우리 악우(樂友)들과 나누겠소.’

그렇게 작별의 말을 하고 나는 돌아섰다. 도저히 3악장 끝까지 이 곡을 들어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중앙묘지, 흩어져 있는 5개 묘지 한 곳으로

시민공원을 나온 우리는 중앙묘지(Zentralfriedhof)를 다음번 행선지로 정했다. ‘음악가의 묘지’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비엔나의 중앙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다.

1874년 비엔나시는 흩어져 있는 5개의 묘지를 한데 모아 중앙묘지를 조성했다. 각계각층 명사들의 묘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제일 유명한 곳이 32A 구역의 음악가들의 묘다.

평소 베토벤을 존경하고 흠모했던 슈베르트는 베토벤이 죽기 전 불과 1주일 전인 1827년 3월 29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토벤을 찾았다. 두 사람은 불과 2km밖에 안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으나 소심한 슈베르트가 주저하다가 늦어진 것이었다.

슈베르트가 자작한 곡의 악보를 보여주자 베토벤은 찬탄했고 일찍 못 만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1주일 뒤 베토벤은 죽었고 슈베르트는 장례식에 참가해 울며 그의 관을 들고 갔다.

그리고 불과 1년 뒤 슈베르트도 죽었다. 그는 자기를 베토벤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중앙묘지가 조성되기 이전인 옛 공동묘지에 베토벤이 1827년에 묻혔고 1년 뒤 슈베르트는 유언대로 베토벤 옆에 누웠다.

나중에 이 두 사람의 묘는 중앙묘지로 나란히 이장되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기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배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슈베르트의 착한 마음이 그의 음악만큼이나 아름답다.

32A 음악가 묘비,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묻혀

중앙묘지역의 두 번째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꽃가게에서 붉은 장미 한 다발을 샀다. 입구에 들어서자 키 큰 가로수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큰길이 시원스레 뻗어있었고 그 맨 위쪽으로 교회가 보였다.

차분한 마음으로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왼쪽에 32A 구역의 팻말이 보였다. 큰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로 세 명의 위대한 음악가들의 묘비가 있었다. 한가운데 모차르트가 있었고 그 양 옆에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있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보았듯 모차르트는 죽은 뒤 커다란 구덩이에 여러 사람과 함께 묻혔기에 나중에 그 시신도 찾지 못했고 무덤조차도 없다. 이를 애석히 여긴 사람들이 그의 묘비만을 여기에 세웠다.

비록 허묘(墟墓)이긴 하지만 그를 존경하는 두 사람의 위대한 음악가가 죽은 뒤에라도 양쪽에서 보좌하고 있으니 너무도 허무했던 그의 죽음이 조금은 위로받았을 것 같았다. 악성 베토벤의 묘는 그의 삶만큼이나 의연하게 굳건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를 흠모하여 죽은 뒤에라도 그의 곁에 있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슈베르트의 묘비가 공손한 모습으로 옆에 있었다. 나는 장미꽃 한 송이씩을 그들의 묘비 앞에 놓았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음악가들에게 나의 마음을 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장미꽃으로 주고받는 마지막 인사

슈베르트에게 장미꽃을 내려놓을 때 그의 노래 ‘들장미’가 생각났다.

“한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소심하고 수줍은 슈베르트는 평생 장미 한 송이를 꺾어보지 못하고 노래만 지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서 다시 가슴이 시렸다. 그가 노래로 들장미 한 송이를 내게 건네는 느낌이 들었다.

‘고맙소, 슈베르트 선생. 노래의 꽃 잘 받았소. 평생 가슴에 담고 살겠소.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하오. 언제 또 만날지 기약할 수가 없소. 선생이 그렇게 흠모하던 베토벤 선생 옆에 계시니 편안히 쉬시오’라고 작별의 인사를 전했다.

그의 묘지 주변에 같이 누워있는 브람스를 비롯한 다른 음악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묘비를 향해 우리는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오월의 비엔나의 날씨는 청명했고 따뜻한 햇볕이 키 큰 나무들 사이를 뚫고 우리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다음 호에 계속>

글과 사진_석운
화요음악회 운영자, 오클랜드 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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