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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운의 동유럽 여행] 신(神)은 그에게만 허락한 소리를 선물로 주셨다

석운의 동유럽 여행(4)_비엔나(2), 베토벤을 찾아서

비엔나에 온지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시민공원을 찾았다. 이틀 전에 왔었지만 중앙묘지에 서둘러 가느라 가보지 못한 베토벤 광장에 가기 위해서였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시민공원 역(U 4 Stardpark)에서 내렸다. 10년 전에 왔던 기억에 의하면 베토벤 광장에는 베토벤의 동상과 비엔나의 양대 콘서트홀의 하나인 비엔나 교향악단의 본거지인 비엔나 콘서트홀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베토벤의 동상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걷다가 길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이상한 조형물을 만났다. 베토벤의 모습을 희화(戱化)해서 만들어 놓은 동상이었다. 너무 재미있게 만들어 놓아서 한참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안 나올 수 없는 작품이었다. 평소 근엄하기 짝이 없었고 한편으로는 성격이 괴팍하기까지 했다는 베토벤의 모습을 이렇게 익살스럽게 표현해놓은 비엔나 시민들의 베토벤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베토벤 동상, 결연하면서도 심각한 태도 느껴져

베토벤은 비엔나 태생이 아니었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베토벤은 1792년 22살에 비엔나에 와서 1827년 사망할 때까지 35년간 인생의 황금기를 이곳에서 활약했다. 그렇기에 많은 비엔나 사람은 그를 ‘비엔나의 음악가’로 생각한다.

베토벤의 장례식에 3만 명의 비엔나 시민이 모여 위대한 예술가의 마지막을 애도했다니 그들이 얼마나 베토벤을 아꼈는지 알 수 있다. 비엔나 중심가에 베토벤 광장을 만들고 또 1880년에 그의 동상을 세운 것은 베토벤을 향한 그들의 존경심의 발로였다.            

베토벤의 동상을 찾았다. 10년 전 모습과 변함이 없다. 결연하면서도 무언가 심각한 태도였지만 10년 만에 찾아온 나를 알아보는 듯했다. 그 무뚝뚝한 얼굴을 약간 오른 쪽으로 돌려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동상 뒤편에 있는 비엔나 콘서트홀에서 금방이라도 그의 피아노 협주곡 한 곡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거장 아르투로 미켈란젤리가 이 콘서트홀에서 카를로 줄리니가 지휘하는 비엔나 교향악단과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명연주였다. 아마도 3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악장 라르고의 조용하지만 슬픔이 담긴 피아노 독주가 들리는 듯했다.

이 곡을 작곡할 때 베토벤은 이미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해 무척 괴로워했다. 이 곡의 초연이 있기 얼마 전인 1802년 10월에는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까지 쓰며 죽음을 각오했다.

서른한 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남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그의 앞에 서서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헤어지기 전에 그에게 인사말을 했다. ‘안녕히 계시오. 마지막 작별 인사는 조금 뒤에 선생이 생전에 머물렀던 하일리겐슈타트의 선생 댁에서 하겠소. 이따가 봅시다’하고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오후에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베토벤 하우스를 가기로 일정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베토벤의 집은 ‘유서의 집’으로 알려져 있다. 베토벤은 그곳에서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썼다. 서른한 살 한창때의 젊은이였다.

그런데 왜 죽음을 생각했어야만 했을까? 20대 후반부터 청력에 이상이 있는 것을 알고 은밀히 치료를 받았지만 별 효과가 없자 의사의 조언대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하일리겐슈타트에 집을 얻어 쉬었다.

귓병은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쉬면서 백방으로 치료를 해도 귓병이 더 나빠지자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극히 쇠약해졌다. 어쩌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동생 앞으로 비장의 유서를 작성하고는 자기가 죽기 전에는 절대 개봉하지 말라고 썼다.

다행히 그는 죽지 않았고 이 유서는 25년이 지난 1827년 그가 56세 일기로 숨을 거둔 다음 날인 3월 27일에야 발견됐다.

비엔나 중심에서 북으로 약 6km 떨어진 하일리겐슈타트는 숲이 많고 냇물이 흐른다. 포도밭도 사방에 있어서 전원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옛날에는 비엔나 시민들이 더위를 피해 찾아오던 곳이었는데 지금 이곳에는 악성 베토벤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다.


베토벤이 유서 말미에 “죽음이여, 언제든 오라.
나는 당당히 네 앞으로 가 너를 맞으리라”고 썼듯이 그는 당당하게 죽음과 맞섰고 이겨냈다.
그리고 그 뒤 살아있는 25년 동안 음악사상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기에 악성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802년 10월 6일 이 집에서 유서를 썼다”

더욱이 그가 유서를 썼던 베토벤 하우스가 있어 명소가 되었다.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라는 말은 독일어로 ‘성인(聖人)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 좋은 이름 덕분에 베토벤 같은 악성이 찾아가 머물게 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 곳을 곧 간다고 생각하니 나는 가슴이 뿌듯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지하철이 종착역인 하일리겐슈타트역에 도착했다. 베토벤 하우스에 가려면 38A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 정거장으로 가면서 내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어디선가 베토벤 냄새가 나는 것 같아”하고 농담을 했더니 아내가 “어이구, 200년전에 죽은 사람 냄새도 맡으니 명품 코를 가지셨네요”하고 맞받아서 한바탕을 웃었다.

어렵지 않게 집을 찾았다. 프로부스가쎄(Probusgasse) 6번지의 베토벤 하우스(Beethoven-Haus)였다. 집 입구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802년 10월 6일 이 집에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썼다’라고 적힌 검은 대리석 판이 악성(樂聖)의 힘들었던 운명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도 존경하던 악성이 머물렀고 또 유서까지 쓴 곳이라 생각하니 상당히 긴장되었다.

오른쪽 벽에 산책하는 베토벤의 모습이 벽화로 걸려 있었다. 책에서 많이 본 익숙한 모습이지만 베토벤 하우스에서 보니 새로운 감회가 느껴졌다. 이렇게 산책하는 그의 머릿속에서는 또 어떤 악상이 떠오르고 있었을까? 그가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때로는 웅장한 교향곡이 때로는 아름다운 협주곡의 선율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데스 마스크에서 험난했던 인생 읽어  

안에는 예쁜 뜰이 있었다. 왼쪽에는 베토벤이 살던 거처였고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기념관이었다. 우리는 기념관으로 올라갔다.

전시된 자료 중에서 먼저 베토벤의 데스 마스크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평온히 잠든 그의 얼굴에서 험난했던 인생 역정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 옆에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가 있었다.

유서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육필 유서 앞에서 나는 엄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유서를 쓰고 곧 죽었더라면 그는 보통의 인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그의 유서 말미에 “죽음이여, 언제든 오라. 나는 당당히 네 앞으로 가 너를 맞으리라”고 썼듯이 그는 당당하게 죽음과 맞섰고 이겨냈다. 그리고 그 뒤 살아있는 25년 동안 음악사상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기에 악성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더 안으로 들어갔다. 피아노 위에 놓인 뿔피리 같이 생긴 이상한 금속 물체에 눈이 갔다. ‘저게 뭐지’ 하는 다음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전율을 느꼈다.

나팔만한 보청기에 의지해 작곡 활동 펼쳐    

베토벤의 보청기였다. 말년에 청력을 거의 잃은 베토벤은 이 보청기에 의지했고 사력을 다해 작곡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작게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나팔만큼 크게 만들었다고 했다.

바로 그 나팔만큼 큰 보청기가 내 눈앞에 있었다. 아니 그 순간 내 눈앞에는 베토벤도 있었다. 한 손으로는 커다란 보청기를 귀에 갖다 대고 다른 한 손으로는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며 필사적으로 음을 들으려 하며 오선지를 채우고 있었다.

‘그렇군요. 당신께서는 그렇게 어렵게 25년 동안 작곡을 하셨군요. 우리가 평안하게 들으며 울고 웃는 당신의 곡들이 이렇게 태어났군요’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독백을 했다. 그랬다. 베토벤은 유서를 쓴 뒤 오히려 절망의 순간을 딛고 일어섰다.

남들이 다 듣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신(神)이 그에게만 허락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그는 주옥같은 걸작들을 쓸 수 있었다. 저 이상하게 생긴 보청기를 통해서 그는 신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불현듯 일어나서 하일리겐슈타트의 숲길을 산책하면서 오히려 신에게 감사하며 작곡을 했을 것이다.

교향곡 6번, ‘전원’-유서 쓰고 죽기 전 만든 작품

그때 그가 작곡한 곡이 교향곡 6번 전원이다. 보통 4악장으로 되어 있는 다른 교향곡과 달리 이 교향곡은 5악장으로 되어있다. 악장마다 제목이 붙어있는데 마지막 5악장의 제목이 ‘목동들의 노래-폭풍우 뒤의 행복한 감사의 마음’이다.

유서를 쓰고 죽기 직전 오히려 신의 은총을 깨닫고 일어서 신에게 감사하는 곡을 쓴 베토벤은 역시 큰 사람이었다. ‘악성(樂聖)’이라는 칭호가 그에게 결코 지나치지 않았다.

이 곡의 4악장에서는 천둥이 치고 폭우가 내린다. 마치 유서를 쓸 때의 베토벤 심정과 같다. 그러나 4악장이 불과 3분 정도에 그치는 짧은 악장인 것처럼 베토벤은 그 역경을 빨리 떨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찾아온 평온함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5악장처럼 베토벤은 평온을 회복하고 일어나서 신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곡을 썼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전원교향곡에 담긴 깊고 큰 뜻을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왔다. 내 머릿속에서는 5악장 도입부의 클라리넷과 호른 소리가 평화롭게 울리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후원으로 나오니 한쪽에 커다란 나팔같이 생긴 나무로 된 조형물이 있었다. 스피커 같기도 하고 아니면 조금 전에 보았던 베토벤의 보청기 같기도 했다. 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스피커 같은 그 작품의 상단에 독일어와 영어로 써진 문장이 있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네 마음을 다스려라.’

나는 그것이 베토벤의 좌우명일 것으로 생각했다. 언젠가 읽었던 로멩 롤랑의 베토벤 평전에서 베토벤이 “전능하신 신이시여! 숲속에 있으면 나는 행복합니다. 거기서는 모든 나무가 당신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베토벤 하우스를 나오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제는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의 내역도 또 베토벤의 깊은 고뇌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칼렌베르그(Kahlenberg) 언덕을 가보고 싶었다. 그 언덕 나무들 사이로 흐르는 작은 냇물을 따라 산책하면서 베토벤이 전원교향곡의 악상을 떠올렸다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총총히 걷는 우리 뒤로 저녁 햇살이 길게 따라오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글과 사진_석운
화요음악회 운영자, 오클랜드 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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