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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화의 상담 이야기] 때로는 꽃보다 위로가 더 예쁘다

정인화의 상담 이야기(3)


하루에 십 분이라도 얼굴을 보며 식사를 하고,
가끔가다 한국 영화를 보러 가고,
바쁜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와 포옹하며 따스한 말을 건넨다면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더불어 살면서 정서적으로 건강한 모습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혼자만의 착각일까.


상담을 하다 보면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앉아 있으면 아픔, 연민과 희망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상담을 통해 다들 치유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가다 그들이 떠오를 때는 나도 모르게 웃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믿었던 엄마에게 어려움을 털어놨지만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은 영국에서 온 삼십 대 초반의 C라는 피 상담인이다. 그는 배우자의 과음과 바람기 때문에 상담실을 찾았다. 본인의 행복이나 평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고, 상담 시간의 대부분을 남편 얘기로 채웠다.

C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을 얘기하라고 하면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다시 남편 얘기를 늘어놓았다. 본인의 얘기를 하라는 것 자체가 고문을 가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C에게는 두 살 어린 D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C와는 다르게 동생은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그는 가끔가다 떼를 쓰고 성질을 부렸다. 자기도 사랑해 달라고 엄마를 붙잡고 울기도 많이 했다.

어느 날 머리를 짧게 자르고 학교에 갔는데 친구 몇이 그가 남자 같다고 놀렸다. 저녁에 그는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엄마에게 얘기했다. 믿었던 엄마가 자기를 토닥여주는 대신에 친구들 편에 서서 타박을 주었다.

“네가 결정했으니 네가 책임져야지.”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세상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버려진 존재같이 느꼈다. 그 뒤 그는 자기 얘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은 경우가 없었다고 하면서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하품하는 심리 치료사, 아무 말도 못 해

일곱 형제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나 가끔가다 정서적으로 무시당했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 그의 얼굴에 겹쳐졌다. 나도 하고 싶은 얘기를 못 한 적이 제법 있다. 어른이 되어서 돈을 빌려주고도 달라는 말을 못 했던 자긍심이 낮았던 시절도 있었다.

뉴질랜드에서는 피 상담인으로 처음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쥐구멍을 찾을 정도로 부끄럽다. 심리 치료사가 갑자기 하품하는데 아무런 말도 못 했던 경우였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상대를 이해하려 하면서 얘기를 계속 이어갔다. 두 번이나 입을 벌릴 대로 벌려가며 하품을 하는 모습을 볼 때는 내 눈을 의심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어 모멸감이 몰려왔다. 지금이라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했을 텐데, 그때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거를 느끼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어린이에 대한 정서적 방치와 그로 인한 공허감의 치유에 관해 연구해 온 미국의 심리학자 조니스 웹. 그는 정서적 방치는 부모가 어린아이의 정서적 요구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않는 거라 했다.

정서적 방치 속에서 자란 아이, 의존하는 것 두려워해

부모가 의도적으로 어린이를 학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의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방치하면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로 고통받는다. 그것뿐 아니다. 부모의 적절한 가르침이 없었기에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자신들의 감정을 알기도 힘들고 믿지도 않는다.

또한, 조니스는 정서적 방치 속에서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된 후에 성공한 사람이 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에 공허감을 느끼면서도 남에게 의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장단점을 모르기 때문에 남들과 맞서 싸우지도 않고, 본인에게는 냉정하면서도 남들에게는 끊임없는 자비와 연민을 보낸다. 죄의식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살다 보니 본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고 빠른 의사결정을 못 하고 긴장 속에 지낸다.

배우자가 미안하다며 빌면 다시 또 받아들여

나와 C는 비슷하게 정서적인 방치 속에서 자랐어도 가정환경은 아주 달랐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먹고 살기가 바빴던 부모님이 일곱 명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일 시간도 없었을 거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부모님이 억척같이 살았던 모습을 이해하면서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C는 엄마와 아버지가 정서적인 방치를 했어도 특별하게 그에게 나쁜 짓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다 보니까 그는 정서적 방치에서 오는 단절감과 공허감을 어른이 되어서도 왜 그런 느낌으로 사는지도 모르게 보였다.

정서적으로 방치된 C는 자신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엄마의 사랑을 받으려고 징징대지 말아야 할 것을 어릴 때부터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배우자가 술을 먹고 바람을 피우며 속을 썩여도, 자기가 없으면 그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면서 자신의 안녕이나 필요는 무시하고 그를 위해 살아야 하는 이유를 계속 찾았다. 이를 통해 그가 가진 낮은 자부심을 감추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하다 하다 지치면 상대방을 개 취급도 안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배우자가 미안하다고 빌고 들어 오면 그가 좀 더 노력하면 앞날이 나아지겠지 하며 그를 또 받아들였다. C를 통해 몇십 년을 술에 빠져 살았던 아버지를 인생의 원수라 하면서도 떠나지 못했던 어머니가 생각나 그가 더 안쓰럽게 다가왔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10년 전에 배웠다면

몇 달간의 상담을 통해서 C는 본인의 감정을 알고 표현하려 노력했다. 자신과 배우자의 해야 할 일을 구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엄청나게 항의했다. 관계를 끝내고 혼자 살겠다는 위협을 했다.

하지만 C는 본인에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표현하면서 요구했더니, 결국에는 배우자가 변하기 시작했다고 수줍게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십 년 전에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면 인생이 더 쉬웠을 텐데 하며 길게 숨을 내쉰다.

십 년이나 지난 후에, 내가 피 상담인으로 만났던 심리치료사에게 과거의 경험을 용기를 내서 함께 나눴다. 미안하다는 말을 예상했는데, 기억이 없다고 하니까 다리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십 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히 잊을 수도 있겠지’ 하는 내면의 소리가 들렸다. 진작에 물어보지 못한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무슨 방법이 있을까. 술 먹고 집에 늦게 들어와 싸운 후, 미안한 감정으로 꽃을 사서 내미는 것도 좋지만, 정서적 지지를 계속 보내는 것은 어떨까.

하루에 십 분이라도 얼굴을 보며 식사를 하고, 가끔가다 한국 영화를 보러 가고, 바쁜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와 포옹하며 따스한 말을 건넨다면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더불어 살면서 정서적으로 건강한 모습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혼자만의 착각일까.


정인화 _심리 치료사

021 0262 3579
junginhwa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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