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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 기자, 두 발로 걷다] “데본포트에서는 내게 딴짓을 허許하라”


박성기 기자, 두 발로 걷다 (3)

데본포트 루프(Devonport Loop)

가는 날이 ‘잔칫날’이었나.

데본포트 루프 도보여행을 떠난 날, 나는 멋진 요트의 행진을 보았다. 파랑, 빨강, 노랑 등 색색의 빛깔로 예쁘게 단장한 요트들이 바다를 수놓고 있었다. 그 위로는 길고 하얀 구름.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사진이 내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요트 대회가 열리고 있었던 것 같다.

수십 척의 요트는 태평양을 향해 거센 물결을 타고 질주했다. 새 한 마리가 유유히 창공을 박차며 날고 있었다. 마치 요트의 앞길을 인도하는 듯했다.

데본포트 부두에서 시작…두 시간 거리를 다섯 시간에

데본포트 루프는 6.6km, 난이도는 중급(Moderate). 어슬렁거리며 걸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나는 이 여행을 마치는데 무려 다섯 시간이나 썼다. ‘걸었다’기보다는 ‘딴짓에 빠져 헤맸다’고 보는 게 맞다. ‘유쾌한 일탈’이라고나 할까.

도보여행은 데본포트 부두(Devonport Wharf)에서부터 시작한다. 오클랜드 시내 부둣가에서는 배로 10분, 차로는 20분 거리다.

데본포트라는 이름은 영국의 데본포트 해군기지(Devonport Naval Base)에서 따왔다. 그전 이름은 플래그스태프(Flagstaff, 깃발). 부두 바로 앞에 높은 깃봉이 있는데 그게 바로 플래그스태프다. 1840년대 초 유니온잭(Union Jack, 영국 국기)이 그곳에서 펄럭거렸을 게 분명하다.

1842년 이곳에 뉴질랜드 해군 군수기지가 세워졌다. 10년 뒤인 1852년 오클랜드 시내와 데본포트를 잇는 첫 페리가 취항했다. 1959년 하버 브리지가 생기기까지 한 세기 동안 데본포트는 노스쇼어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100년이 훌쩍 넘은 고택(古宅)들이 즐비한 이유이기도 하다.

빅토리아 로드(Victoria Rd)로 들어섰다. 수백 년을 지켜왔을 거목과 고목이 여행객을 반겼다. 첫 딴짓은 책방에서 시작됐다. ‘북마크’(Book Mark), 헌책방. 몇 년 전 이곳에 들렀다가 셰익스피어 전집을 보았다. 16세기에 출판된 거니까, 이순신 장군보다 더 연세가 드신 게 분명했다. 그때 책방 주인이 수천 달러를 달라고 해서 포기했다. 가난한 선비(?)의 서글픈 마음을 그 누가 알까.

데본포트 영화관(VIC), 남반구에서 가장 오래 돼

책방 옆에는 디 아케이드(The Arcade)라는 고색창연한 건물이 있다. 초창기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다. 이발소도, 지역 안내소도, 척추 교정원도 있다. 그중 내 눈길을 끄는 건 빨간 벽돌로 꾸며진 카페. 앉아만 있어도 철학을 논하고 싶고, 명문이 줄줄 나올 것 같은 공간이다.

건물 복도에 데본포트 역사를 압축해 설명한 벽보가 걸려 있다. 읽는 데 15분밖에 안 걸린다. 부디 역사를 외면하지 마시길 부탁한다.

빅토리아 로드를 따라 위로 쭉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 맨 끝에 빛바랜 영화관이 나온다. 이름이 근사하다. ‘더 빅 데본포트’(The VIC Devonport). 건물이 작아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다.

남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 건물이다. 1912년에 세워졌으니, 한 세기가 이미 지났다. 지금은 옛날의 영화(榮華)를 뒤로하고 동네 극장으로 전락했지만, 볼만한 명작들이 종종 들어와 주민들에게 눈요기를 해주기도 한다. 뉴질랜드 젤라토(Gelato, 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도 여기가 고향이다.

빅토리아 길을 중심으로 오래된 건물이 많다. 다 빅토리아풍이나 에드워드풍으로 지어졌다. 데본포트가 괜히 영국의 오래된 도시같이 느껴지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100년은 다 잡수신 분들이니까 너무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지 말기를 바란다.

플래그스태프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마이클 킹 기념관에서 문학도들 창작 꿈 펼쳐

마운트 빅토리아(Mount Victoria)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국 여행객 중 열에 열한 명은 들르는 곳이다. 오클랜드 시내 전경을 가장 멋지게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데본포트 초등학교를 막 지나면 왼쪽에 집 한 채가 보인다. 시그널맨스 하우스(The Signalman’s House)다. ‘데본포트 신호수의 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신호수의 안내를 받아 배들이 안전하게 항구 품에 안겼다. 일종의 등대 역할을 한 집이었다.

현재는 뉴질랜드의 유명한 역사학자 마이클 킹(Michael King, 1945~2004)의 기념관으로 쓰인다. 작가들이 무료로 공간을 빌려 밤을 새워가며 창작 활동을 한다. 박경리기념관 같은 곳이라고 보면 된다. 마음 편하게 글을 쓸 둥지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조금은 거센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더 위쪽으로 내디딘다. 전에는 차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쉽게도(아니다, 다행히도) ‘두 발로만’ 가야 한다. 보호 정책 때문이다. 물론 사람 발짓(자전거)과 착한 기름(오토바이크)으로 움직이는 건 무사통과다.

산 정상(187m)에 올라서면 오클랜드 전경이 파노라마가 되어 눈을 휘어잡는다. 360도 풍경이 마음마저 탁 트이게 해준다. 이곳은 마오리의 요새(pa)이기도 했다. 타카룽아(Takarunga, ‘저 위에 서 있는 언덕’이라는 뜻)가 원래 마오리 이름인데, 2014년 그 이름을 되찾았다.

산 입구에 ‘Takarunga’라고 크게 쓰여 있고, 그 밑에 조그마한 글씨로 Mount Victoria로 되어 있다. 주인이 바뀐 게 아니라 원주인에게로 돌아갔다고나 할까.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거든…”

타카룽아 정상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나만 먹기가 미안해 하늘 길을 가다 잠시 멈춰선 새 여행자에게 조금 떼어줬다. 성경 말씀 중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거든~”하는 구절이 생각나서였다. 새 여행자는 “나그네를 대접해 줘서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면 누구보다 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오른다.

“야~ OO야. 뉴질랜드가 정말로 좋긴 좋구나.”

나는 속으로 내가 한 효도치고는 썩 괜찮았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발걸음을 아래로 향한다. 다음 목적지는 동네 골목길을 따라가면 나온다. 골목이 사라진 세상은 유령이 사는 곳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높은 빌딩이, 비싼 옷을 걸친 사람이 많아도 사람 냄새 나는 골목길이 없다면 그건 좀비들의 세상일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 김점선은 생전에 ‘백조 프로젝트’를 꿈꿨다. ‘백조 원이 생기면 종로 한복판에 있는 빌딩을 다 헐어 공원과 골목길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하늘나라로 옮겨간 그가 그곳에서는 꿈을 이뤘을 거라고 믿는다.

골목길은 정겹다.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어도 집과 집 사이에 사람 사는 냄새가 배어있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블라우스 세 벌이, 큰 나무 아래로 매달려 있는 그넷줄이 여행자를 외롭지 않게 해준다.

“나 이렇게 살다 간 사람이오”하는 흔적도 만날 수 있다. 담장에다 조상의 이름과 직책, 다닌 학교 등을 적어 놓은 집이 가끔 보인다. 명문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앞서 산 사람들의 발자취를 소중히 여겨 뜻깊게 품고 사는 집이 명문가다.

노스헤드, 터널 루프를 따라 한 번 걸어보시길

마웅가우이카(Maungauika), 영어로 노스헤드(North Head)라고 하는 곳이다. ‘Head’는 ‘꼭대기’. ‘곶’이라는 뜻이니까 오클랜드 ‘북쪽 꼭대기’가 된다. 아쉽게도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른다. 마운트 빅토리아보다 노스헤드가 더 멋진 데도 말이다.

이곳은 1870년부터 1996년까지 100년이 넘게 해군 기지로 사용된 군사 기지였다. 물론 군사 시설의 자취는 아직도 남아 있다. 영국과 러시아 사이가 안 좋아져 그 여파가 멀고 먼 뉴질랜드까지 번질 것을 염려해 쌓아 올린 시설물의 잔해도 상흔(傷痕)처럼 곳곳에 널려 있다. 내가 이민 온 뒤 다음 해까지 해군 훈련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노스헤드의 헤드(머리 꼭대기)에 오르면 눈앞에 랑기토토 섬이 떡 버티고 서 있는 게 보인다. 그 형이상학적인 ‘물체’를 대하는 순간 갑자기 경외심이 생긴다. 나는 랑기토토 섬을 ‘무욕(無慾)의 섬’이라 부른다. 욕심이 없는 섬.

노스헤드를 걸어서 여행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서밋 루프(Summit Loop)-입구 안내판에 표시된 파란 실선을 따라 걸으면 된다. 산 윗길을 주로 걷는다. 25분 걸린다.

▷코스탈 루프(Coastal Loop)-하얀 실선으로 되어 있다. 바닷가를 따라 걷는다. 곳곳에 비경이 숨어 있다. 종종 세월을 낚는 강태공도 눈에 뜨인다. 30분 잡으면 된다.

▷터널 루프(Tunnels Loop)-노란 실선이 여행자의 갈 길을 안내해 준다. 중간중간 참호가 나오기도 한다. 20분이 필요하다.

나는 어떤 길을 걸었을까?

굳이 묻지 마시길. 딴짓에 빠져 세 길을 왔다리 갔다리 하며 헤맸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내가 알고 정보를 하나 준다면, 이 가운데 터널 루프(비록 일부였겠지만)가 제일 멋졌다. 소문에 의하면 터널 어딘가에 옛날 비행기의 조각들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호기심 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봐도 좋다. 단, 굴 안이 어둡기 때문에 손전등은 필수품이다.(핸드폰 전등은 80% 정도 OK.)

데본포트는 딴짓을 권하는 동네임이 분명

두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도보여행이 다섯 시간이나 이어졌다. 딴짓 탓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꼭 내 잘못만은 아니다. 2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데본포트에서는 딴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종종 딴짓을 해야 사는 일이 즐겁다.

“데본포트에서는 내게 딴짓을 허하라.”



새는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팅! 팅! 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전문



글과 사진_박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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