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NZ라이프 여행 ‘무욕無慾의 섬’에서 ‘텅 빈 충만’을 느끼다

[박성기 기자, 두 발로 걷다] ‘무욕無慾의 섬’에서 ‘텅 빈 충만’을 느끼다


박성기 기자, 두 발로 걷다 (6)


랑기토토 섬 루프(Rangitoto Island Loop)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딱 두 줄로 된 시 ‘섬’, 정현종 시인의 대표작이다. 이 시를 생각하면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오클랜드에서는 그 어떤 섬보다 먼저 랑기토토 섬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섬이다.

랑기토토 섬을 열 번 정도 다녀왔다. 최근 몇 년은 매해 말 혹은 초마다 찾았다. 랑기토토의 정기를 받아 한 해를 뜻깊게 살기 위해 나 홀로 산행을 즐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늘 같은 코스로만 다녔다. 도보 여행(Tramping)이 아닌, 성찰과 계획의 묵직한 발걸음인 탓이었다.

랑기토토는 마오리 말로 ‘핏빛 하늘’ 뜻

9월 마지막 토요일 아침, 오클랜드 페리 빌딩 앞(Pier 4)에서 배를 탔다. 반 시간도 안 돼 랑기토토 섬에 닿았다. 나는 랑기토토 섬을 ‘무욕(無慾)의 섬’이라 부른다. 아무 욕심이 없는 섬.

- Advertisement -

토요일 하루치기 도보 여행에 나선 사람들이 꽤 많았다. 겸손하게 무리를 앞으로 내 세우고 나는 맨 뒷전에서 홀로 걸었다. 철저하게 ‘무욕’과 동행하고 싶었다. 위대하고 거룩한 자연의 숨결만 느끼면 된다.

랑기토토 섬은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화산섬이다. 지질학자들은 550년~600년 전 마지막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랑기토토(Rangitoto)는 마오리 말로 ‘핏빛 하늘’(Bloody Sky)을 뜻한다. 숱한 용암의 잔해들이 섬 곳곳에 널리 퍼져 있다. 한때 세상을 삼킬 것 같았던 그 열정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콘 플레이크처럼 투박하게 생긴 작은 돌들이 여행자들 발에 밟힌다. 화산석(현무암) 조각이다.

10여 분쯤 걸었을까. 크고 작은 검은 화산석들이 태양에 반사되어 기름 빛을 발한다. 왼쪽에는 랑기토토 화산의 어제와 오늘을 설명해 주는 안내판이 보인다. 어린아이나 학생과 동행한 여행이라면 이곳에서 잠시 과거에 빠져보는 것도 좋다.

내 눈에 띈 글귀 한 대목.

“랑키토토 섬은 잠을 자고 있을까, 아니면 완전히 죽었을까.”(Dormant or Extinct?)

답은, 직접 찾아가 확인하면 된다. 굳이 힌트를 하나 준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살아 있을 때는 불꽃 쇼를 보기는 힘들다는 것.

정상에 오르기 전 ‘용암 동굴’ 꼭 둘러보길

정상을 향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내디딘다. 약간은 경사가 있지만 초보자라도 무난하게 발을 뻗을 수 있다. 새 천 년이 시작되고 한 해가 흐른 해 첫날 아침, 세 살짜리 내 막내 아들놈도 아빠 도움 없이 오로지 제 두 발로만 씩씩하게 걸어간 길이다.

배에서 내려 정상 길(Summit Track)을 따라 쭉 걸으면 45분 정도에 그럴싸한 쉼터가 나온다. 그쯤에서 ‘가던 길 멈춰서고’, 무욕의 섬과 깊은 얘기를 나눈다. 랑키토토 섬을 찾을 때마다 내가 하는 의식이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사방이 확 트인 정상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둘러 가면 용암 동굴과 만난다. 경험상 동굴에서 잠시 명상(?)을 한 뒤 정상의 기운을 맘껏 들이마시는 게 좋다.

참, 동굴에서는 손전등이 필수다. 핸드폰 불빛으로는 안 된다. 길이도 만만치 않고, 어둠의 농도도 깊다.

동굴 여행을 하고 다시 쉼터로 돌아오는데 반 시간도 안 걸린다. 다음은 무조건 정상에 올라야 한다. 조금은 거친(내가 보기에 가장 힘든 길) 산길이다. 쉼터에서 15분 정도면 하늘과 맞닿을 수 있다.

정상 높이는 260m. 오클랜드에서 제일 높은 곳이라는 마운트 이든 꼭대기(Mount Eden, 194m)보다 훨씬 높다. 랑기토토 정상에는 360도 파노라마 풍경이 펼쳐진다. 하우라키만(Hauraki Gulf)에 점점이 박혀 있는 섬들도 보이고, ‘물욕(物慾)의 화신’ 같이 느껴지는 스카이 타워도 보인다. 천하에 부러울 게 없어지는 순간이다.

마오리에게 £15 주고 사…한때 하루 여행지로 유명

지상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1897년에 만들어졌다. 그보다 10여 년 전부터 랑기토토 섬은 오클랜드 시민들의 당일치기 여행지였다. 당연히 정상으로 가는 길이 필요했다. 1854년 영국 왕실이 마오리들에게 15파운드를 주고 산, 가로세로 폭이 5.5km나 되고 2,311헥타르(약 700만 평)의 면적을 자랑하는 이 보물은 오클랜드의 아이콘이 되었다.

여기서 잠시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 분들이 있다. 1925년부터 1936년까지 랑기토토 섬의 산길 여러 곳을 닦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죄수였다. 그 ‘노동자’들의 수고가 훗날 우리 ‘여행자’들의 기쁨이 되었다.

덧붙여 꼭 알려줄 게 하나 더 있다. 랑기토토 섬은 1920년~1930년대 휴가 마을이었다는 사실이다. 조그마한 휴가용 집(Bach House)이 140채가 넘었다. 그 가운데 현재 서른 채 정도가 흔적으로나마 남아 있다. 부두 바로 앞에 있는 집 한 채는 안팎을 고쳐 박물관으로 쓰고 있고, 그 옆 바닷가에 붙어 있는 서너 채는 민박용 집으로 사용된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일주일만 민박집을 빌려 책도 읽고 삶도 되돌아보는 휴가를 보냈으면 좋겠다.

정상 주위를 신전으로 생각해 경건한 마음을 품고 한 바퀴를 돌았다. 분화구의 깊이는 60m, 지름은 200m. 천천히 둘러보는데 10분 정도 걸린다. 그 사이 2차 세계대전 방어용으로 구축한 진지들이 보인다. 총칼로 무장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이 먼 섬까지 스멀스멀 기어 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화산석, 열병식 준비하는 군인들처럼 도열해

발걸음을 아래로 향한다. 이번에는 평소와 다른 방향. 전에는 늘 지름길(왕복 5.5km~6km)로만 오갔다. 길게 잡아도 3시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명색이 도보 여행자(Tramper). 호칭에 걸맞게 걸어야 한다.

정상에서 왼쪽 길(Summit Road)을 따라 내려오다가 맥켄지 베이 로드(McKenzie Bay Road)를 만난다. 그곳부터 부두까지 마냥 걷는 코스다. 출발지에서 계산하면 12km에 이르는, 짧지 않은 길이다.

내리 세 시간을 걸었다. 그사이 만난 도보 여행자는 딱 둘.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이다. 사실 어려운 길은 아니지만, 한없이 지루하고(?) 단조롭게 이어진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볼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참 여행자는 별것 아닌 것에서 별것을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무언(無言)의 것들이 유언(有言)하는 걸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무욕에서 텅 빈 충만을 느끼면 된다.

길가에는 숱한 화산석의 무리가 열병식을 앞둔 군인들처럼 쭉 늘어서 있다. 어느 누가 인위적으로 손을 댄 흔적도 찾기 힘든 자연 그대로다. 한때의 열정을 묵언으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는 여행자의 마음이 착잡하다.

다음에 혹시라도 이곳을 찾을 도보 여행자를 위한 도움말.

세 시간을 걷는 동안 마땅히 쉴 만한 공간을 찾기 힘들다. 날씨가 좋으면 더 문제다. 변변히 햇볕을 가릴 만한 데도 없어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한 시간 정도를 앞에 두면 바닷바람을 조금은 느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여름철이라면 포후투카와 꽃들의 군무(群舞)를 제일 멋지게 볼 수 있다는 점도 보너스가 될 것이다. 랑기토토 섬은 포후투카와 최대 군락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풍부하게 소유하기보다는 풍요롭게 존재하길

등대가 보이는 바닷가를 지나자 부두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흘러간 사람의 발자취가 눈에 들어온다. 다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련하게 시들어가고 있는 빈집들이다. 그 어느 한때 그곳에서는 왁자지껄하게 잔치가 열렸을 것이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고 떠들고 마시고. 하지만 지금은 파도 소리와 새 소리만 허공을 울릴 뿐이다.

오후 3시 50분, 나를 태울 배가 천천히 들어서고 있다. 오늘의 마지막 배(4시). 이 배를 놓치면 나는 무인도에서 홀로 밤을 새워야 한다. 누군가가 “최고의 여행은 실종”이라고 했지만, 최고로 멋진 여행을 하기에는 아직 자신이 없다.

이제는 무욕의 섬을 떠날 시간.

법정 스님은 ‘텅 빈 충만’을 설파했다. 그 책을 읽고, 나는 풍부하게 소유하기보다는 풍요롭게 존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이 쉰을 넘어, 반백 년을 살고 나서 얻은 지혜였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오로지 읽고, 쓰고, 걷고 이 세 가지에만 집중해 살려고 한다.

배에서 마지막 경적이 울려 퍼지던 순간,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1883~1957)가 묘비에 새겼다는 말을 되새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글과 사진_박성기 기자

저작권자 © ‘뉴질랜드 정통교민신문’ 뉴질랜드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Advertisement -

타임즈 인기글

‘투표가 최고의 심판’…여권 들고 투표장으로

말 많고 탈 많은 오클랜드한인회, 지금 이대로는 안 돼 타임즈의 눈 제15대 오클랜드한인회 선거가...

“김우식 선관위, 한인회 돈이 그렇게 우스웠나”

◉ 타임즈의 눈 ‘15대 선거 비용 정산서 내부 감사 보고서’를 읽고 14대보다 $15067 더...

“이제까지 뉴질랜드에 이런 선거관리위원장은 없었다”

◉ 타임즈의 눈 선관위 운영 미숙으로 오클랜드한인회장•감사 선거 연기돼 제15대 오클랜드한인회장과 감사 선거가 6월...

리디아 고, 2019년 공로 훈장 받았다

리디아 고 특별 인터뷰 5월 15일 총독 관저에서 럭비 선수 대니얼 카터 등과 함께 뉴질랜드 한인 1.5세대 리디아 고(고보경)가 2019년 새해 공로 훈장을 받았다....

“하노이 정상회담은 2막…여러 막 거쳐야 대서사시에”

북한‘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에서‘완전히’에는 거부감 있어 지난 3월 17일(일) 뉴질랜드타임즈 도언태 발행인은 문재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를 맡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