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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흠의 뉴질랜드 꽁트] 마지막 손님

레스트 하우스

금요일 오후, 한 주일간 누적된 택시 운전. 그 고단함이 앤디 어깨를 짓눌렀다. 여린 미루나무 잎들이 소슬 댔다. 비스듬히 비추는 햇살에 택시도 나른해 했다. 오클랜드 근교를 지나는데 택시 콜이 울렸다.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이니 특별히 모시길.

손님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색 바랜 선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셀윈 레스트 하우스, 요양원이었다. 허름한 건물 모퉁이에서 연로한 할아버지가 보행기를 밀고 나왔다.

푸석한 옷섶

왼쪽 발을 절며, 주춤주춤한 걸음이었다. 앙상한 나무 같은 할아버지 얼굴, 검버섯 위에 늦가을 기운이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다. 앤디가 앞좌석 문을 열고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태웠다. 미루나무 가지처럼 몸이 가벼웠다. 힘이 없어 보여 안전띠를 잡아당겨 매어 드리는 데, 걸리는 몸집은 없고 푸석한 옷섶만 잡혔다. 보행기에서 바구니를 꺼내 트렁크에 실었다. 작은 손지갑과 열쇠고리 그리고 약봉지와 손바닥만 한 성경책이 담겨 있었다.

햇살 한 움큼

-저녁 햇살이 따사해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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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이야기로 인사를 건네며 차 시동을 켰다.

-응, 편안해.

할아버지 대답이 나뭇잎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어디로 모실까요?

-저기로.

새가 날아간 뒤,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턱을 그쪽으로 움직였다.

-저기는 석양 노을 물드는 서쪽인데요.

할아버지가 왼손을 창밖으로 뻗어 햇살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힐스브로우… 레스트 홈.

감들이 그네를

오클랜드 서쪽 산자락 아래에 있는 국립 요양원. 20여 분쯤 걸릴까? 저녁 풍경을 따라 차분하게 운전했다. 아기 손바닥만 한 미루나무 잎들이 노란 손수건을 흔들듯 팔랑거렸다. 석양빛을 받아 더욱 발 그래진 감잎 사이로 빨간 감들이 그네를 탔다. 신호 대기 선에 서자 할아버지가 창밖을 지긋하게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감이 곱게 익었구먼.

-할아버지 얼굴도 평화스러운데요.

-기사 양반, 한국 사람 맞지?

-예, 어떻게 알았어요?

-한국전쟁. 나, 가평 전투에 참여했었어….

-아! 그러셨어요? 너무 감사하네요. 그 덕분에 한국은 지금….

69년을 맞는

할아버지가 앤디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평 전투에서 왼쪽 다리를 다쳤다고. 앤디 가슴이 먹먹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 6·25참전 용사분을 모실 줄이야. 한국전쟁이 터지고 벌써 69년을 맞는 해다. 수천 명의 젊은이가 남태평양 섬나라 뉴질랜드에서도 자원했다. 전쟁에 나설 당시, 할아버지 마음을 생각하니 숙연해졌다. 전쟁으로 어려운 나라에 도움을 준 연결고리로서, 한세상을 살아온 할아버지 생애에 무한 신뢰와 감사를 느꼈다. 할아버지가 싱긋 웃고서 이내 눈을 감으셨다.

은은한 종소리

-나, 졸리는데….

-예, 편히 주무셔요.

앤디가 할아버지를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조심해서 운전했다. 대자연과 더불어 인간 세상에도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단풍들 듯 사람도 나이 들어가며 감 홍시처럼 익어갔다. 평화스럽고 한적한 동네 길로 들어섰다. 뾰족한 첨탑이 있는 성당이 유난스레 고풍스러웠다. 편히 주무시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그 앞을 지났다. 성당 첨탑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흩뿌려졌다. 할아버지 고개가 점차 창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안전띠를 풀어

힐스브로우 레스트 홈. 숲으로 둘러싸인 요양원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쪽 언덕에 자리한 큰 규모의 요양원이었다. 앤디가 건물 입구에 택시를 조심스레 세웠다.

-할아버지, 다 왔어요.

할아버지 오른쪽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깨우려고 손으로 가볍게 톡톡 쳤다. 아직 잠이 든 채로 그대로였다. 할아버지를 흔들었다. 꽉 채워진 안전띠를 풀어냈다. 차창 쪽으로 기울어진 할아버지가 바깥쪽으로 쏠려 쓰러졌다. 재빨리 부축하려는데 앤디 몸을 덮치며 할아버지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고개를 좌우로

순간 앤디 머리털이 곤두서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앤디에게 간신히 기대어 있는 할아버지를 차 안에 바로 눕혔다. 부리나케 사무실로 달려가 비상 상황을 알렸다. 앤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이 든 남자 직원이 뛰어나와 할아버지를 깨우려 흔들어댔다. 꿈쩍 않았다. 할아버지 얼굴을 만져보고 코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안타까운 얼굴을 한 채 한마디 나직이 내뱉었다.

-세상에…. 이 할아버지 돌아가셨네.

다급하게 남자 직원이 서둘러 조처를 했다. 사무실 직원들과 옆 간호 병동 간호사가 뛰어나왔다. 곧바로 바퀴 달린 침대에 할아버지를 옮겨 싣고 간호 병동 쪽으로 옮겨갔다. 앤디가 트렁크를 열고 보행기를 꺼내 직원에게 전해주는데 발이 후들거렸다.

빚이 없어야

-택시 요금이 얼마나 나왔어요?

그 직원이 물었다. 이 마당에 택시 요금은 무슨? 하며 앤디가 고개를 휘저었다. 직원이 택시미터를 들여다보더니 한마디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삼십 달러 나왔구먼.

할아버지 소지품 바구니에서 돈 지갑을 찾아 삼십 달러를 꺼내 건네주었다. 손사래를 계속하니 직원이 짧게 한마디 했다.

-택시 요금은 받아요. 빚이 없어야 할아버지도 마음 편히 가실 거요.

저 세상 가는 길까지

앤디는 멘붕이 왔다. 머릿속에선 과실 운전, 사망 원인 제공, 법적 문제, 합의 등등의 생각들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이 와중에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진정이 덜된 상태라 간신히 말문을 여는데도 떨렸다.

-증인이 필요하면 불러요. 명함 여기 있어요.

직원이 머리를 흔들며 앤디 명함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나직이 위로를 해줬다.

-걱정하지 마세요. 구십 연세의 이 할아버지. 전부터 심장이 좋지 않아 고생해온 거요. 당신은 저 세상 가는 길까지 잘 모셔다드렸어요. 진정하고 어서 가봐요.

감 홍시 단내를

정신이 나간 채로 앤디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할아버지 보행기를 끌고 사무실로 사라지는 직원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 세상이 가물가물 눈에 들어왔다. 십수 년째 택시 운전을 해오던 중, 오늘은 생의 마지막 손님을 태워다 준 날이었다. 마지막 손님치고는 너무도 특별한 분이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할아버지…. 보행기 바구니 속의 손지갑과 열쇠고리 그리고 약봉지와 성경책이 눈에 아른거렸다. 돌아서는 발길 너머, 저녁노을이 감 홍시 단내를 저어 올리며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

백동흠<수필가>

2017년 제19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대상 수상
Birkenhead Transport 근무
글 카페: 뉴질랜드 에세이문학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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