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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고전음악과 추억담

고등학교 시절 첫 고전음악 한 시간 모두 달콤한 낮잠으로 때워
나이 들어가며 고전음악 덕에 노후의 여가 큰 걱정이 되지 않아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면 제일 부러운 것은 좋은 서재에 가득 찬 책과 명기로 불리는 오디오가 있는 집이다. 주인장께서 자랑삼아 명반을 하나 골라서 틀어 주면 그날의 최고 대접이 되리라.

사람도 책도 음악도 그냥 만나지는 게 아니고 어떤 인연의 연줄이 있어서 서로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한다.

1960년대 중반이면 전축이 있는 집이 드물었고 그런 연유로 해서 서양 고전음악을 듣는 것은 거의 희귀한 일이 되었다. 처음으로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고등학교 음악 시간이었다.

갓 음대를 졸업한 젊은 남자 선생님이 칠판에다 크게 ‘1812’를 적었다. 그런 다음 “1812년이 어떤 해인지 아는 사람?”하고 질문을 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 하는 사이 재룡이가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해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탄성을 질렀다.

뒤에서 아이들이 “1812년 하고 음악하고 무슨 상관이고?”하는 사이 젊은 음악 선생님은 오늘 음악 시간에는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오버추어)을 감상할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1812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그리고는 음악을 들려주셨다. 쿵쿵거리는 타악기와 현악기 소리에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고전음악은 고사하고 음악 시간 한 시간이 모두가 달콤한 낮잠을 즐기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열정적인 음악 선생님의 깊은 속뜻도 모른 채 이처럼 고전음악과의 첫 대면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서 20대 초반에 부산 사는 친구의 소개로 ‘오아시스’라는 다방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도 이 다방 또한 클래식을 틀어 주는 다방이었다. 그 시절 안으로부터 솟구치는 열정과 고뇌로 서성이던 젊은이들의 아지트가 바로 이 다방이었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화가 그리고 중견 예술인들이 가끔 와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일 층으로 된 일본식 목조 건물이어서 한길에서 다방으로 들어 가자면 삐걱거리는 계단이 기억에 남아 있고 마룻바닥으로 된 실내와 등받이가 높은 의자가 있어서 음악을 듣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 다방에는 고전음악 원판(엘피판)이 많았다. 주인이 고전음악을 좋아하는 외항선 선장이라 그렇다고 하였다. 우리가 뚱뚱이라고 부르는 나이가 좀 든 노처녀 누나가 있었다. 그 누나는 손님 차 시중과 음악실 디제이를 겸하고 있었다. 듣고 싶은 곡이 있으면 쪽지에 적어서 신청하면 들을 수도 있었다.

호주머니가 늘 빈약한 젊은이들에게 이 다방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한번 커피를 시켜서 마시고 나면 그날은 하루 내내 다방을 들락거릴 수도 있고 또 음악을 듣다가 지루하면 옆에 있는 선술집에 가서 따끈한 정종을 한 잔씩 하고 다시 돌아와 음악을 듣거나 잡담을 할 수 있어서였다. 별다른 일이 없는 주말에 심심해 이 오아시스에 가면 동네 사랑방처럼 아는 얼굴들이 두셋씩은 꼭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일석이가 날마다 오아시스에 와서 가슴앓이하는 것도 보았고 장마가 이어지는 여름날 오후 비 내리는 모습을 보며 저음의 첼로 곡을 들으면서 젊음의 열기를 낮추기도 했다. 고전음악을 매개로 이런 사람 저런 사람과도 많이 만났던 곳이 오아시스 다방이었다.

이렇게 오아시스에서 보낸 세월 속에서 나도 모르게 고전음악에 대한 친근감이 생겼고 음악듣기가  나의 또 다른 분신처럼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음악은 삶의 한 부분이 되어 고희를 넘긴 지금까지 내 곁에 남아서 나의 오랜 벗이 되었다.

사정이 여유롭지 못해서 변변치 못한 구닥다리 오디오 기기를 수십 년 가까이 모시고 사는데 아이들이 새 걸로 하나 장만하라고 해도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그런 엄두를 낼 수가 없다.

영어 알파벳 두 번째 글자 ‘비’가 첫 글자로 들어가는 음악가들을 좋아하고 최근에는 보로딘과 엘가의 곡들이 귀에 끌린다. 고전음악과 인연으로 노후의 여가가 그리 걱정이 되지 않는 게 참으로 다행스럽다.


구춘수_시인


◼︎외부 필자의 글은 뉴질랜드타임즈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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