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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 기자, 두 발로 걷다] 시월의 어느 날, 생명으로 오신 ‘비님’이여


박성기 기자, 두 발로 걷다 (7)


와이타케레 댐(Waitakere Dam)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BC 640?~546?)가 한 말이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이 말을 끄집어낸 이유는 ‘근원의 집합지’를 찾아 도보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짐을 간단하게 챙겨 서쪽으로 향했다. 하루는 ‘웨스티’(Westie, ‘오클랜드 서쪽에 사는 사람’을 가리킴)로 살고 싶어서였다.

아라타키 관광 안내소는 ‘교육의 장’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아라타키 관광 안내소(Arataki Visitor Centre). 와이타케레 산맥 지방 공원(Waitakere Ranges Regional Park, 16,000헥타르)의 관문 같은 곳이다. 시닉 드라이브(300 Scenic Drive, Oratia)에 자리 잡고 있다.

아라타키는 ‘배움의 장’(Place of Learning), 쉽게 말해 ‘학교’라는 뜻이다. 유치원 어린아이들과 초·중등 학생이 교육 삼아 가거나 와이타케레 산맥의 한 부분을 걷거나 잠시라도 만끽하고 싶은 시민이나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다.

댐에 대한 자료가 필요해 안내 창구에 섰다. 고희(70세)는 충분히 되어 보이는 할머니 안내인이 나왔다. 회색으로 된 윗도리에 파크 레인저(Park Ranger, 공원 관리인)라고 쓰여 있었다. 이 지역 토박이임이 분명했다.

안내인 이름은 팸(Pam). 나는 질문을 하나만 던졌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열 개가 넘었다. 할머니 특유의 지나친 친절함이었다. 설명을 끊기 위해 기념품을 하나 샀다. 손 크림. 받은 호의에 견줘 훨씬 적은 성의였지만, 이익금이 공원 관리에 쓰인다고 하니 도보 여행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 관찰 도로, 와이타케레 공원의 축소판

1층에 아담한 극장이 보였다. 안에 들어가니 와이타케레 공원을 소개하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12분짜리 영상물이었다. 무리와이의 가넷부터 피하의 서핑까지, 산길을 따라 걷는 도보 여행자부터 패러 글라이딩을 타고 창공을 나는 사람까지 와이타케레 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압축해 보여주었다.

팸 할머니의 도움말을 믿고 ‘자연 관찰 도로’(Nature Trail)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참, 그 전에 알아둘 것은 이 관광 안내소부터 그 유명한 힐러리 트레일(The Hillary Trail)이 펼쳐진다는 점. 아쉽게도 지금은 7구간만 걸을 수 있다. 나머지(1~6 구간)는 보수 공사 중이다.

자연 관찰 도로는 와이타케레 공원의 축소판이다. 시닉 드라이브를 가로지르는 지하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관찰 도로가 보인다.

“500년 동안 풀을 제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 말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자연 관찰 도로다. 이 코스는 0년~50년(Farm to forest, 해발 205m), 50년~200년(Protective layer, 해발 180m), 그리고 500년 이상(Kauri cathedral, 해발 150m)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 바퀴 도는 데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관찰’ 도로인 만큼 빨리 걸으면 안 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월의 흐름을 마음속으로 계산하면서 걸어야 한다. 500년 뒤인 2500년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무가 죽으면 ‘사체’는 뒷세대에 거름이 돼

내 관찰기를 잠깐 소개한다.

나무가 나이가 들어 죽으면 그 ‘사체’는 뒷세대의 거름이 된다. 100년 동안 ‘썩고 또 썩어’(더 좋은 영양분이 되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박테리아로, 균으로 변해 다음 세대를 키우는 데 힘이 되어 준다.

‘카우리 대성당’(Kauri cathedral) 지역으로 들어섰다. 가는 길은 나무 카펫(?)으로 장식되어 있다. 눈앞에 ‘거목’ 한 그루가 떡 버티고 서 있는 게 보인다. 설명서를 읽어보니 600세가 넘으셨다고 한다. 세종대왕님과 같은 세대의 분이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카우리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나무다. 2천 년 넘게 살 수 있다는, 예수님보다 앞서 태어났다는, 위엄과 경륜을 자랑하고 있다.

카우리의 특징은 자라면서 아래 것을 자기가 치고 올라간다는 점. 잔가지가 없다는 말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으며 올라간다. 나무가 돌덩이처럼 단단해 최고급 목재로 여겨진다. 아쉽게도 지금은 다이백(Dieback) 때문에 카우리가 사는 숲길은 많이 막혀 있다. 등산객들의 발에 묻은 흙으로 병이 옮겨져 보호 차원에서 출입을 막고 있다.

시닉 드라이브, ‘등골 빠지게 힘든’ 공사를 거쳐

관찰 도로를 벗어나 댐 길로 차를 몰았다. 시닉 드라이브. 이 길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설명문 제목이 독특하다.

‘Unlovely Work.’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불쾌한 노동’쯤 될까. 시닉 드라이브는 티티랑이(Titirangi)부터 스완슨(Swanson)까지를 잇는 산악 도로다. 바닷가를 기준으로 왼쪽 지역은 다 와이타케레 산맥 지방 공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길이는 42km, 마라톤 구간과 같다. 폭은 7.3m.

이름은 ‘경치가 좋은(Scenic)’ 도로이지만, 공사 과정은 한없이 불쾌했다. ‘등골 빠지게 힘든’(back breaking) 작업을 거쳐 오클랜드 서쪽 지역의 아름다운 대푯길로 자리 잡게 됐다.

1937년 시작된 이 공사는 2년 뒤인 1939년 6월 10일에 끝났다. 1930년대 세계적인 경제공황의 여파는 뉴질랜드까지 번졌다. 실업률이 15%까지 치솟았다. 마오리와 여성들의 실업률까지 합치면 30%에 가까웠다.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백수였다는 뜻이다. 1934년 오클랜드 학생들의 70%가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고난의 시기였다.

뉴질랜드 정부는 국책사업으로 도로 닦기에 나섰다. 중장비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정글 같았던 산을 오로지 손과 발의 힘만 써서 역사를 만들어냈다. 공사비는 93,000파운드.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들과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흘린 피와 땀의 비용은 계산하기조차 힘들다.

설명글을 읽고 있다 보니 괜히 마음이 쓰렸다. 그러면서 ‘경치가 좋은’ 그 길을 앞으로는 경건한 마음으로 운전하며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와이타케레 댐, 1910년에 완공돼

아라타키 관광 안내소에서 스완슨 쪽으로 10km 정도 달리다 보면 ‘와이타케레 댐’(Waitakere Dam)이라는 글자가 쓰인 간판을 볼 수 있다.(유심히 봐야 한다. 잘 못 하다가는 스쳐 지나갈 수 있다.) 와이타케레 산맥 지방 공원에 있는 다섯 개 댐 가운데 가장 오래된 댐이다. 1910년에 완공됐으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의 일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아래로 쭉 내려가면 댐이 나온다. 저수지 면적은 25.1헥타르(76,000평 정도), 소장한 물의 양은 1.76기가리터(17.6억 리터)다. 이 댐은 인근에 있는 후이아 댐(위, 아래) 등을 합쳐 오클랜드 식수의 20%를 공급하고 있다. 60%는 오클랜드 남쪽에 있는 후이아 댐(4곳)에서 담당한다.

와이타케레 댐이 생기기 전까지 오클랜드 시민들은 오클랜드 도메인(Auckland Domain)과 웨스턴 스프링스(Western Springs)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오리들이 놀던 연못의 물을 끌어다 가정에 공급했다. 시민들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장기적인 공급 계획이 필요했다.

적당한 곳은 와이타케레 산맥. 개울물 주위에 댐을 세우고 저수지로 삼았다. 이곳은 시내보다 빗물을 50% 더 보관할 수 있다. 높은 지대에 있다 보니 자연 정수도 가능했다.(박테리아가 물 밑 깊숙이 스며든다.) 한 해 평균 강수량은 어른 남자의 키보다 조금 큰 1.8m(1,800mm), 천혜의 조건이었다.

마른하늘에 갑자기 ‘비님’이 오시다

30여 분을 걷자 댐이 보였다. 한 방울 두 방울 예쁘게 내리던 가랑비가 갑자기 소나기로 번졌다.

비님이 제대로 오시기 시작한 것이다. 관광 안내소에 쓰여 있던 일기 예보 ‘날씨 좋음. 별난 소나기도.’(Fine with odd shower)가 딱 맞았다.

소나기를 무릅쓰고 댐 끝에 섰다. 한 사람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온통 물뿐이었다. 땅의 물로는 부족한지 하늘의 물까지 더해졌다. 만물의 근원인, 생명의 물이었다. 사람과 동물과 식물을 살리는.

차를 타고 기수를 돌렸다. 와이타케레 산맥 지방 공원 안에 있는 또 다른 댐 길, 후이아 댐(Lower Huia Dam & Upper Huia Dam)을 따라 걷는 길로 들어섰다. 몇 차례 도보 여행을 한 적이 있어 내게는 친숙한 길이기도 하다. 왕복 두 시간 반 정도 걸었다.

“싱잉 인 더 레인.”(Singing in the rain.)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비님을 벗 삼아 물에 흠뻑 젖어 도보 여행을 즐겼다. 생명과 함께 한 여행, 오랜만에 ‘별난’(odd) 걷기를 했지만, 마음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시월의 어느 날, 생명으로 오신 비님 덕분에 나의 영혼은 조금 더 푸르러졌다.

“자연은 결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윌리엄 워즈워스)



글과 사진_박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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