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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 기자, 두 발로 걷다] ‘쓴 길’ 견뎌낸 그대, 앞으로는 ‘단sweet 길’만 걷기를


박성기 기자, 두 발로 걷다 (8)

첼시 농장 유적 공원(Chelsea Estate Heritage Park)
& 켄달만(Kendall Bay)


시내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가기 위해 하버 브리지를 건널 때마다 유독 눈에 띄는 큰 건물이 한 채 보인다. 왼쪽으로 15도 정도에 위치한 이 건물은 진한 분홍색(산호색, coral pink)으로 치장하고 뭇 눈길을 유혹한다.

게다가 오클랜드에서는 찾기 힘든 높은 굴뚝이 하늘로 향하고 있어 한 번쯤은 그 정체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키위들의 행복한 식탁을 책임지는 곳, 첼시 설탕(Chelsea Sugar) 회사다.

멋진 산책길이 이곳을 끼고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10여 년 전에 그 근처의 바닷가를 걸어 내려간 적이 있었지만, 그곳이 첼시 산책길과 이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환상적인 오클랜드 풍경 볼 수 있어

날씨가 흐렸다 갰다 하던 토요일 정오, 달콤한 길 맛을 즐기기 위해 집을 나섰다. 시내에서 15분 거리(9km), 내가 사는 집에서는 20분 거리다. 구글이 알려준 안내 길에는 버켄헤드 콜로니얼 로드(Colonial Road) 끝이다.

‘콜로니얼’(식민지의)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궁금했다. 뉴질랜드 정부가 도로 이름을 만들 때는 꼭 그렇게 지을 만한 까닭이 있었다는 게 내 글쓰기 경험상 맞다. 콜로니얼 설탕 정제소(Colonial Sugar Refinery Company)에서 따온 것이다. ‘첼시 설탕’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이다.

첼시 농장 유적 공원(Chelsea Estate Heritage Park, 줄여서 첼시 공원)은 이름 그대로 첼시 설탕 회사를 중심으로 한 공원이다. 여기에 ‘헤리티지’(유적)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유는 바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첼시 공원의 면적은 회사가 노스쇼어시에 판 38헥타르를 포함한 240헥타르(73만 평). 부담 없이 하루 소풍, 혹은 걷기 여행을 즐기기에 딱 좋은 곳이다. 공원 안에는 작은 호수(연못이나 계곡물처럼 보이기도 한다)도 있고, 댐도 있다. 게다가 날씨가 좋으면 환상적인 하버 브리지와 오클랜드 시내 풍경을 볼 수 있는, 관광 명소라고 생각한다.

첼시 설탕, 1884년 설립…이색 조형물도 있어

덤으로 회사 건물 한쪽에 우아한 카페(Chelsea Bay)와 빵 만들기 학교가 마련되어 있어 인생의 단맛을 잠시라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첼시 설탕은 1884년에 설립됐다. 135년 전 일이다. 뉴질랜드의 유일한 설탕 제조 회사다. 그 당시 버켄헤드 주민의 50%가 첼시에서 흘러나온 돈으로 생계를 꾸렸다. 뉴질랜드 집 부엌에 있는 설탕 제품은 모두 첼시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콜로니얼 로드에 집 네 채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한 눈으로 봐도 고풍스러우면서도 위엄이 느껴진다. 초창기 회사 임원들이 살았던 주거 공간이다.

그 옆부터 첼시 공원이 시작된다. 축구장만한 잔디 벌판 가운데 이상하게 생긴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게 앞다리처럼 생긴 조형물이다. 호기심 많은 도보 여행자가 그냥 지나갈 리 만무하다.

첼시 공원 안에 있는 조형물. 집게발 사이에 있는 사각 덩어리가 내게는 각설탕처럼 느껴졌다.

계곡물에 흑고니(black swan)도 살아

조각가 빌 헤이즈가 60년(1943년~2005년)이 넘게 설탕 원료를 배에서 건져 올린 집게(grab)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 집게는 자기 사명을 다할 때까지 총 800만 톤에 이르는 원료 더미(원당)를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았다. 여러 공정을 거쳐 달곰한 맛이 버켄헤드는 물론 오클랜드 전역에 퍼졌다.

참고로 현재 첼시 설탕 회사는 4~6주 간격으로 원료를 인도네시아 등에서 수입해 정제한다. 한 번에 2만7천 톤을 들여온다. 뉴질랜드 전 국민이 소비할 수 있는 양이다.

이번 기회에 설탕 종류가 정말로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흰 설탕, 누런 설탕, 가루 백설탕, 커피 설탕, 가루 설탕, 원당(raw sugar), 황갈색 설탕, 당밀(Golden Syrup), 잼 만드는 용 설탕, 흑설탕, 종려 설탕(palm sugar), 파넬라 설탕(중남미의 사탕 나무로 만든 조당).

아래쪽으로 천천히 걷다 보면 오리 계곡(Duck Creek)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오리 서식처다. 그뿐 아니라 장어와 가마우지도 계곡을 헤엄쳐 다닌다.

운 좋으면 흑고니(black swam, ‘진귀한 것’이라는 뜻도 있음)의 춤도 즐길 수 있다. 첼시 공원의 독특한 자랑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 계곡이나 호수에서 만날 수 있는 생물들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 설립 100주년 기념 카우리 공원도

느리게 아주 느리게, 단(sweet) 걸음을 한 시간 반 정도 걸었다. 날씨만 화창했다면, 오클랜드 시내 풍경을 한참 즐겼을 것이다. 아쉽게도 비가 오락가락해 멋진 사진을 한 장도 건질 수 없었다.

요의를 진정시키려고 카페 옆 화장실에 들렀다. 등산용 옷에다 지팡이까지 든 내 모습이 남과 확연히 구분됐다. 커피를 한 잔 마실까 말까 고민하다가 대신 잠깐이라도 공부를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해 옆으로 샜다.

첼시 베이(Chelsea Bay)라고 부르는 이곳은 설탕의 역사와 효능(물론 좋은 점만)을 설명하는 교육 공간이다. 또한 빵 만들기 실습 공간도 갖추고 있어, 그 누구보다 달콤한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들은 억지로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찾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명색이 도보 여행자인데 첼시 공원만 걷고 끝나기에는 20% 정도 아쉬웠다. 발길을 바닷가 쪽으로 뻗었다. 켄델만(Kendall Bay)이 다음 목적지. 그 사이에 카우리 포인트 100주년 공원(Kauri Point Centennial Park)이 펼쳐져 있다. 1984년 첼시 설탕 회사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공원이다. 오래전 마오리들이 살던 시절, 카우리 나무가 많이 있던 곳이었다.

순간 무인도에 서 있는 듯한 느낌 들어

켄델만을 오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왕복 두 시간 거리. 비가 와서 그랬는지 땅도 질었고 잔 나무뿌리들도 계속 발에 걸렸다. 길의 끝을 몰랐더라면 중간에 돌아오고 싶었던 길이었다. 다른 길로 가기는 했지만, 다행히 전에 좋은 사람과 좋은 기분으로 갔다 온 추억이 담겨 있어 어떻게든 다시 가보고 싶었다.

그저 도보 여행자일 뿐인 내가 숲길 여행자로 변신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열 번 넘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바다가 나왔다. 이 대목에서 ‘멋진 바다’라는 표현을 써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흉흉한 파도가 바닷가를 내리쳤다.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무인도에 온 느낌이 들었다.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또 조금은 황홀하기도 한.

100m 앞에는 돛단배 한 척이 힘들게 바람을 거슬러 제 갈 길로 흘러갔다. 이쯤 되면 도보 여행자이면서 글 쓰는 노동자이기도 한, 내 본성이 서서히 나오게 된다. 앉을 만한 곳을 찾아 바닷가를 끼고 걸었다. 썰물 때라면 그냥 쉽게 갔을 길을 어색한 자세를 하며 어정어정 발걸음을 옮겼다.

“파도야! 잠잠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마침 적당한 곳이 나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왕의 자리’(King’s Seat) 같았다. 마치 나를 위해 예비해 둔 것처럼 말이다. 왕좌(王座)에서 왕이 할 일은 하명(下命)뿐. “파도야! 잠잠하라”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파도 소리에 놀라 입을 벙긋하기조차 힘들었다.

10분을 버티기 힘들었다. 파도가 더 거세게 왕의 자리를 탐냈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내줘야 했다. 자연 앞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다.

다시 숲길을 따라 걸었다. 온 길은 조금 힘들었지만, 갈길은 다소 쉽게 다가왔다. 경험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점을 피부로 배웠다.

첼시 공원에 들어섰다. 달콤한 공기가 코로 들어왔다. 거친 숲길을 걸은 탓인지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작은 배낭을 벗어 던지고 집게 조형물 앞에 앉았다. 어렴풋이 하버 브리지 너머 스카이 타워가 보였다. 한 시간 만에 절해고도에서 문명 도시로 온 느낌이다.

집게 조형물을 유심히 살폈다. 처음에는 없었던 것 같았던 하얀 물체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각설탕처럼 생긴 사각형 상자였다. 이 조형물을 설치한 예술가의 깊은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설탕은 빈속 채워주던 ‘신비의 명약’

아주 어린 시절, 초등학교 1~2학년 때였다. 집에 먹을 것이 없으면, 어머니 몰래 설탕을 물에 타서 먹었다. 설탕마저 안 보이면 당원을 풀어 마셨다. 그러면 빈 속에 달곰한 물이 흐르면서 새 기운을 얻을 수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설탕은 인생을 달콤하게 만드는 ‘신비의 명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첼시 공원을 소개하면서 마지막까지 숨겨 놓고 쓰지 않은 게 하나 있다.

과연 ‘첼시’(Chelsea)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나오게 됐을까? 하는 것이다. 정답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지만, 영국의 명문 프로축구 클럽 첼시와 혼동할 것 같아 만천하에 공개한다.

뉴질랜드의 첫 세관원이었던 사람의 고향(영국 첼시)을 기리기 위해 그렇게 정했다.



첼시 설탕 회사 웹사이트(회사 견학 프로그램과 각종 요리법 등이 소개되어 있다.)
http://www.chelsea.co.nz
첼시 농장 유적 공원 주소
Colonial Rd, Chatswood, Auckland

글과 사진_박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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