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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화의 상담 이야기]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정인화의 상담 이야기(8)

언젠가는 끝나는 삶 속에서 쉽게 살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기꺼이 그 바람을 맞으며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올해 이월이었든가. 2019년 책상 달력을 얻었다. 호기심에 달력을 쭉 흩어 보았다. 여러 글귀가 쓰여 있었지만,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러 번 ‘살아야겠다’를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그 뜻이 궁금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들었던 강렬한 느낌이 사라졌고, 그리고 잊혀졌다.

한 달 전에 한국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가는 고국 방문이라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도, 가능하면 판문점, 울릉도, 독도, 서울 광화문 거리와 서초동, 국립공원을 가보기로 했다. 분단, 애국, 정의, 개혁, 부패, 단풍 등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여행 일정을 짜는 동안에 올해 받았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 여행이 내가 계획한 대로 안 되려는지 판문점 관광은 돼지 열병 때문에 취소되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라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며칠 동안이나 줄어들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다음 날, 낮에는 광화문 거리를 저녁에는 서초동을 다녀왔다. 많은 사람을 보니 가슴이 뛰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아니고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한국에 살았으면 ‘나는 어느 거리에 서 있을까?’라는 질문이 인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살아야겠다’라는 의지 사이

일요일에는 단풍을 보기 위해 북한산 국립공원을 가기로 했다. 한참을 헤맨 뒤에야 북한산 입구를 찾았다. 네 시간 정도면 산행을 끝마칠 수 있겠지 생각하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일행들에 섞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뒤처진다. 숨을 헐떡이며 앉을 곳을 찾는다. 그런 과정을 몇 번 거친 뒤에는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솟는다.

최근 들어 ‘내 덩치가 어때서’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나이가 들면서 변해가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커다란 덩치를 잘 감당하지 못하고 앉을 곳만 찾는 모습을 보면서 그 의도를 의심했다. 어쩌면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대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싫어하는 나 자신을 위한 자기방어나 변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육 개월 전에 상담실에서 J를 만났다. 그는 내가 본 피상담자 중에서 가장 커다란 몸집을 가진 사람이었다. 많이 나가는 체중 때문에 일어서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고, 걸으면 무릎에 생기는 통증 때문에 될 수 있으면 걷지 않으려 했다. J는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몸무게로 인해서 생활의 질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대신에 뉴질랜드 복지제도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에 대해 불평하느라 상담 시간의 대부분을 흘려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방어에 푹 빠진 J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궁금해졌다. 주어진 삶이니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과 주어진 삶일지라도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고 하는 ‘살아야겠다’라는 의지 사이에서 그는 어디에 있을까.

남들에게 종속적이지 않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북한산을 오를수록 단풍이 더 예뻐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몸이 그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내려가자고 결정했다. 내려오면서 왼쪽 무릎 쪽에서 고장 났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통증을 줄이기 위해 옆으로 걸었다. 게같이 걷는 모습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식구들이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고 걱정스럽게 놀릴 때마다 ‘내 덩치가 어때서’라고 방어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J가 상담실로 힘들게 걸어오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갑자기 달력에서 봤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글귀가 생각난다.

오클랜드에 돌아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구글에 검색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 폴 발레리가 쓴 ‘해변의 묘’에서 나온 말이었다.

남진우 시인은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연습’에서 발레리보다 더 나갔다. 그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라고 썼다. 삶을 초월한 유명한 스님이 아니고 시인이 은유적으로 쓴 바람이 나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존재는 옷깃을 스치는 바람결에서, 또는 흔들리는 나뭇잎을 통해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꽃이 많은 종류의 바람을 맞으면서도 피듯이, 바람은 우리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삶의 욕구를 일깨운다.

어떻게 보면 바람은 사람들이 성장하게끔 자극을 준다. 바람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뜻하는 바를 알아 적극적으로 바람에 맞서거나 의도적으로 바람을 탈 수도 있겠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성숙해진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면서 몸속에서 느꼈던 바람은 현실을 직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내 덩치가 어때서’나 ‘다시 태어나면’이라는 자기 합리화라는 유혹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해줬다. 바람이 불든 안 불든 상관없이 뜻있는 삶과 남들에게 종속적이지 않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겠다. 건강을 챙기는 것이 그런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바람을 맞으며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경의를

오래전에 떠난 한국에서도 여러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 부는 대로 밀려다니며 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인생은 편도 티켓을 가진 자들의 여정’이라고 했다. 언젠가는 끝나는 삶 속에서 쉽게 살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기꺼이 그 바람을 맞으며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커다란 몸을 이끌고 힘들게 살아가는 J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안에 있는 삶에 대한 의지를 일깨웠으면 좋겠다. 하지만, ‘J가 바람에 흔들릴 때, 내가 그의 옆에 잘 서 있을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 떨어지는 자신감에 어깨가 처진다.

책상 위에 있는 조그만 달력 속의 문장을 읽어본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정인화 _심리 치료사

021 0262 3579
junginhwa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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