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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전원일기] 나는 아직도 어린 왕자다

뉴질랜드 전원일기(8)

얘들아. 올해도 우리 더불어 살자.
잘난 것도 못난 것도 다 함께 어우러져 얼그렁덜그렁 더불어 살자꾸나.
비록 나이는 한 살 더 먹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어린 왕자가 되어
나와 인연 맺고 길들여진 것들에 책임을 지며
다 보듬고 사랑하며 나의 길을 가야겠다.

고추들이 잘 자란다. 튼튼하게도 잘 자란다. 아침저녁 오다가다 틈만 나면 고추밭에 앉아 고놈들을 어루만진다. 기울어진 놈은 바로 세워주고 곁순이 무성한 놈들은 순도 쳐주면서 예쁘다 예쁘다를 수없이 반복한다. 그러면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올해는 그 애물단지 괴물 고추를 안 심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하며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지난 한 해 내 속을 엔간히도 썩였던 그 괴물 고추. 고추에도 괴물이 있을까마는 작년에 씨앗 회사의 팸플릿 사진만 보고 고추씨를 사서 심었다가 아주 낭패를 당했었다. 해마다 씨앗 회사에서 보내주는 팸플릿에 담긴 여러 종류의 고추를 보면서 한 번은 꼭 심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고추들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한국 고추들이야 청양 아삭이 꽈리 이름 따라 맛도 용도도 판이하게 틀리지만 외국 종자들은 이름도 없고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물론 아주 매운 땡고추나 월남산 고추들은 대충 구분을 하겠는데 그 외의 일반 고추는 별다른 특징 없이 그냥 고추였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른 채 무조건 살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나중에 볼 일이었다.

대충 훑어보고 복권 고르듯 번호를 찍어 주문했고 모종을 만들어 심었다. 수인처럼 번호가 매겨져 있는 그 고추의 번호는 534였다. 534는 모종을 만들 때부터 잎이 크고 아주 실해 보였다. 뭔가 대박이 날 고추처럼 보였다.

멋모르고 심었다가 제대로만 된다면 굳이 한국에서 고추씨 들여오느라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될 거라는 후한 기대 심리도 발동했다. 534는 떡잎부터 달랐다. 자라는 속도도 빠르고 열매도 큼직하게 먼저 달렸다.

그런데 그 큼직한 게 문제였다. 동화 속 잭과 콩나무처럼 쑥쑥 자라면서 고추의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피망인 듯 하더니 나중에는 뚱뚱한 몸매에 한 뼘도 넘게 마구 자라서 땅을 뚫고 들어갈 지경이었다. 거인 나라에서 온 고추인 것이 분명했다. 몬스터 괴물 고추였다.

이걸 어쩌나 이걸 어쩌나 하는 사이 가을이 오고 534는 빨갛게 잘도 익어갔다. 진홍색으로 빛깔도 선명하게 탐스러웠다. 그러나 밭으로 그득한 고추들은 팔리지도 않을뿐더러 쓸 데가 없었다. 반으로 갈라서 말려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냥 말리면 표피가 두꺼워 수분 증발이 안 되고 그대로 곯아버렸다.

생각다 못해 반으로 갈라 널 수밖에. 이 또한 문제였다. 일반 고추들은 반으로 갈라 널어놓으면 훨씬 빨리 마르는데 이 괴물 고추들은 반으로 갈라도 접힌 부분은 곰팡이가 피고 도통 마르지를 않았다.

나중에는 오징어 말리듯 포를 떠서 잘게 부수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늦은 밤까지 하우스 안에 불을 밝혀 놓고 가위질을 해댔다. 다행히 고추가 커서 마른 고추들이 금세 자루를 채웠다. 진짜 대박이 나는 줄 알았다. 그렇게 한국 고추의 몇 갑절 공을 들이고 품을 들여 간신히 말리는 데까지는 성공을 했는데….

이번에는 방아 찧는 게 또 문제였다. 포를 떠서 말린 큰 고추들이 방아에서 그대로 밀려 나오고 당분이 높아 방아 기계를 끈끈하게 메꿔 버렸다. 결국 방앗간에서조차 푸대접을 받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초벌만 빻은 채 돌아온 고추들은 정말 애물단지였다. 거름더미에나 던져버렸으면 좋겠는데 들인 공이 아까워 그럴 수도 없었다. 빛깔도 곱고 맵지 않아 맛은 좋은데 가루로 만들지 못하니 방법이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맷돌 믹서에 조금씩 갈아 우리나 먹을 수밖에.

몇십 킬로그램이나 되는 괴물 고춧가루는 앞으로 10년을 먹어도 끄떡없을 만큼 냉동고에 그득하다. 이렇게 고생을 실컷 했기에 올해 534는 절대 모종을 만들지 않았다. 씨앗도 꽤 남았지만 과감히 포기해 버린 거였다. 덕분에 밭에 그득히 심어진 고추들을 보는 내 마음은 흐뭇할 수밖에 없었고 웃음이 절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얼마전 고추밭을 지나다 나는 묘한 고추 나무를 보게 되었다. 줄기와 이파리에 털까지 숭숭 난 그 거대한 고추 나무가 큼직한 고추를 달고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뭐야?”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자 예서쟤서 그와 유사한 고추들이 벙실벙실 웃으며 나를 반기고 있다. 한두 그루가 아니었다. 어떤 고랑은 아예 전체가 그 괴물 고추로 채워져 있다.

그토록 씨앗을 조심해서 분리했건만 나도 모르게 534를 섞어서 파종한 모양이었다. 덜렁대는 내 성격 어디 갈까. 두세 줄은 돼 보이는 534 몬스터 괴물 고추를 바라보는 내 심정은 웅담을 한 움큼 털어 넣은 것처럼 쓰디썼다. 올해도 고생문이 훤하겠구나 싶어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어쩌랴. 못생겨도 괴물이어도 쓸모가 없어도 내가 씨를 뿌리고 심어놓은 녀석들인걸. 처음에는 미운 마음에 다른 고추들부터 줄을 매주고 뒤로 미뤘지만 어제까지 534도 다 줄을 매고 순을 치면서 정리해 주었다.

어떤 이는 놈들을 키우지 말고 밑동을 잘라버리라고 하지만 나는 차마 그러지 못한다. 길들인 장미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어린 왕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내가 키우는 식물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져버릴 수는 없다.

꽈리나 청양 같은 고추들은 이제 겨우 작은 열매 몇 개씩 달기 시작하건만 우리의 괴물 나으리께서는 위풍도 당당하게 쭈쭈빵빵 잘도 크고 있다. 나는 그 초대받지 못한 괴물들에게 입을 맞추며 잎새들을 쓰다듬어 준다.

얘들아. 올해도 우리 더불어 살자. 잘난 것도 못난 것도 다 함께 어우러져 얼그렁덜그렁 더불어 살자꾸나. 비록 나이는 한 살 더 먹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어린 왕자가 되어 나와 인연 맺고 길들여진 것들에 책임을 지며 다 보듬고 사랑하며 나의 길을 가야겠다.

이인순
1953년 서울 성동구 금호동에서 태어나 1982년 아동문학연구로 동화작가로 등단. 아동문예 신인상, 동쪽나라 문학상, 대교출판 아동문학상을 받았다.
동화집 『콩콩이가 된 시인아저씨』, 『백설공주를 미워한 난장이』, 『뉴질랜드로 이민 간 종일이네 가족』과  『행복한 이민자들』(공동 집필)을 펴냈다.
1994년에 이민 온 뒤 현재 워크워스에서 한국채소 농장을 20년째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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