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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Z Great Walks를 걷다] ‘무작정’ 떠난 초보 여행가, 첫날 길을 잃다

뉴질랜드타임즈 2020년 특별 기획
뉴질랜드의 위대한 올레길(NZ Great Walks)을 걷다


통가리로 노던 서킷(Tongariro Northern Circuit) 1

뉴질랜드타임즈는 2020년 특별 기획으로 ‘박성기 기자, 뉴질랜드의
위대한 올레길(NZ Great Walks)을 걷다’를 30회에 걸쳐 연재한다.
뉴질랜드가 자랑하는 ‘위대한 올레길’은 북섬에 세 곳, 남섬에 여섯 곳,
스튜어트섬에 한 곳 등 총 열 곳에 걸쳐 있다.
통가리로 노던 서킷을 3회로 나눠 첫 번째로 싣는다.<편집자>


나는 ‘전문’ 등산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보통’ 등산가도 못 된다. 도보 여행자(tramper)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그저 ‘걷는 걸 즐기는 사람’이다.

먼저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걷는 시간 못지않게 쉬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1000 걸음 걷고 10분 쉬고, 한 시간 걷고 15분 쉰다. 점심시간은 30분이나 된다. 그사이 내 영혼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는다. 솔직히 말하면 힘이 모자라 오래, 빨리 걷지 못한다는 말이다.

1990년 3박 4일 동안 에베레스트산 올라

1990년 7월 에베레스트산을 오른 적이 있다. 3박 4일 동안 나와 동갑내기인 네팔 현지인 친구와 함께했다. 전문 등산가가 아닌 탓에 가볍게 생각하고 산에 올랐다.(4,000m 지점에서 시작한다.)

‘세계의 지붕’인 에베레스트는 위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6,000m 지점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네팔 친구가 고산병을 앓아 할 수 없이 중간에 그만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멀쩡했다.

그 황홀한 기억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산을 오르는 즐거움, 산장에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와 차, 낯선 이들과 나눈 대화 그리고 자연의 오묘함과 신비함.

서른 해 뒤, 나는 다시 그 맛을 즐기기 위해 배낭 짐을 꾸렸다. 첫 번째 행선지는 뉴질랜드 북섬 한가운데에 있는 통가리로 노던 서킷(Tongariro Northern Circuit). 통가리로 국립 공원 안 나우루호에산(Mt. Ngauruhoe 2,287m) 주위를 한 바퀴 도는 3박 4일(45km) 여정이다.

10월 28일 노동절 날, 올레길 산행길 나서

10월 28일(월) 노동절 날, 오클랜드를 떠난 지 다섯 시간 만에 화카파파 빌리지(Whakapapa Village)에 도착했다. 올레길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노동절 즈음에 통가리로 국립 공원을 소풍 삼아 놀러 가던 키위들의 전통(?)을 조금이라도 따라 하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첫 기착지인 망가테포포 산장(Mangatepopo Hut. 1,190m)을 향해 출발했다. 길을 나서자마자 조금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뉴질랜드는 봄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지만 해발 1천 미터가 훌쩍 넘는 통가리로에서는 봄의 자취를 찾기 힘들었다. 조금은 황량하기도 한, 태곳적 정적이 주위를 감쌌다.

숙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이정표가 보였다. ‘무작정’(정말이다) 그 길을 따라 걸어갔다. 한 해 전 통가리로 노던 서킷 첫날 코스(9.4km)를 걸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 없이 걷기 시작한 것이다.

‘어! 이 길이 아니구나…’ 그나마 타마 호수가 위로해 줘

한 시간을 넘어 두 시간쯤 걸었을 때 ‘이 길이 위대한 올레길 코스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마 호수(Tama Lake. 1,314m)에 들어섰을 때였다. 화카파파 빌리지에서 하루 걷기 코스로 딱 어울리는 구간이다. 4시간이면 오갈 수 있으면서도 통가리로 국립 공원의 이모저모를 다 맛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호수를 막 떠날 즈음, 우박을 동반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방수복을 꺼내 입었다. 어쩔 수 없이 지도를 꺼내 들었다. 나는 목적지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믿었던 도끼의 날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에 나무를 벨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래도 타마 호수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화산 분출로 생긴 호수를 처음 보았고, 어쩌면 두 번 다시 가기 힘든 그곳을 다녀왔다는 내 나름의 위안을 삼았다. 타마 호수는 600년 전 이곳을 처음 오른 마오리 부족장 타마티아(Tamatea)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타라나키 폭포는 ‘사랑 전쟁의 눈물’이던가

걸음을 뒤로 돌려야만 했다. 시계는 벌써 정오를 넘어 있었다. 첫날 통가리로가 내게 준 선물치고는 고약했다. 두 시간을 더 걸어 거의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숱한 볼거리를 스쳐 갔지만 우박과 진눈깨비와 거센 비 때문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회군이 끝나갈 무렵에 만난 타라나키 폭포(Taranaki Fall)에서는 잠시 쉬지 않을 수 없었다. 1만5천 년 전 루아페후 화산 폭발로 생긴 이 폭포는 높이가 20m에 이른다. 거대한 물속에 낀 작은 물들(빗물)이 빗어낸 장관은 일찌감치 여독에 지친 도보 여행자의 마음을 조금은 풀어주었다.

뉴질랜드 북섬 중앙 서쪽에 있는 타라나키(Taranaki, 영어는 New Plymouth)라는 지명이 왜 통가리로 국립 공원에 있는지 조금은 궁금해할 수 있다.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한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의 얘기다. 통가리로산 인근에 절세미산(絶世美山)이 있었다. 예쁜 것 옆에는 그 예쁜 것을 차지하고 싶은 놈이 있는 것은 당연.

오후 3시 다시 원점으로…침 뱉어 운명에 물어

이 절세미산을 두고 많은 산이 경쟁했다. 승산(勝山)은 통가리로산(1,967m)이었다. 2등은 타라나키산(2,518m). 하지만 사랑 전쟁에서 2등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타라나키산은 눈물을 머금고 그 지역을 떠나 지금의 자리를 잡았다.

먼 길을 떠나다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들고 뒤를 보며 흘린 눈물 덩어리가 바로 타라나키 폭포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통가리로 공원에서 타라나키산을 볼 수 있다. 연적은 그렇게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

거의 원점으로 돌아간 시각은 오후 3시, 이정표에는 첫 행선지인 망가테포포 산장까지 세 시간이 걸린다고 표시되어 있다. 얄밉게도 ‘날씨가 나쁘면’(in bad weather) 5시간까지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기로였다. 손바닥에 침을 뱉어 운명에 물었다. 직진. 이미 산장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각에 ‘두 번째’ 첫날 산행을 다시 시작했다. 비는 주룩주룩, 마음은 심란심란. 투덜거릴 시간도 아까워 배낭끈을 조였다.

4시간 산행 거리를 10분만 쉬고 주파(?)해

한 해 전 걸었건 길과 똑같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찾은 것이다. 진흙 길도, 개울 길도, 도랑 길도 그대로였다. 다만 거센 비 탓에 걸음을 제대로 옮기기 힘들 뿐이었다.

전에 즐긴 산들바람도, 따듯한 햇살도, 길고 흰 구름도 없었다. 그저 앞발을 믿고 뒷발을 옮기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실패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중간에 10분을 쉬고 4시간을 내리 걸었다. 안타깝게도 내 팔이 되어 주었던 장비 하나가 수명을 다했다. 등산용 지팡이 한 개가 고된 행군을 못 이기고 부러졌다.

사실 날씨만 좋으면, 아니 마음만 편하면 통가리로 둘레길의 묘미를 맛볼 수 있는 구간이 바로 이 구간이다. 많이 힘들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된 걷기 운동을 할 수 있는 코스로 짜여 있다.

적당히 숲길도 있고, 물길도 있고, 들길도 있다. 화산 냄새도 나고, 숲 냄새도 나고, 풀 냄새도 난다. 전에 걸은 기억이 좋게 남아 있어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애정이 가는 구간이다.

산장 바깥에 걸려 있는 등산용 지팡이, 또 다른 손들이다.

밤 7시 산장에 도착, 열한 시간 18km 걸어

나는 패잔병 같은 모습으로 산장에 도착했다. 밤 7시였다. 쉬는 시간을 포함해 열한 시간 동안 18km를 걸어 볼품없는 보금자리에 몸을 기댔다. 아침 9시에 출발했으니 무려 10시간 넘게 걸은 셈이다. 위대한 올레길의 신고식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아니, 초보 도보 여행자가 겪어야만 하는 첫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산장에는 이미 열댓 명의 등산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시아계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난롯불 위로 양말과 겉옷이 널려 있었다. 꾀죄죄한 행색을 한 등산객들이 카드놀이를 하며 얘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무렵, 늙수그레한 서양 남자가 산장 문을 열었다. 오늘의 마지막 산장 친구였다. 두 번째 첫날 산행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 존(이었을 거로 믿고)이었다.

화카파파 빌리지 숙소 식당에 비치된 초창기 배낭들.

몸은 천근만근, 어깨는 삭신삭신…과연 내일은

9시쯤 침낭 속에 지친 몸을 맡겼다. 몸은 천근만근, 어깨는 삭신삭신. 과연 내일 둘째 날 산행을 무사히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것도 통가리로 노던 서킷 가운데 가장 코스가 험난하고 거리도 먼 길을.

산장의 빛과 열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한 줌의 태양 빛도 볼 수 없었고, 잠시 피운 장작불도 정말로 완벽한 자연(스스로 그러함)의 세계로 돌아갔다.

10분도 안 돼 나는 꿈나라로 떠났다. 몇 겹의 옷을 걸쳐 입었어도 추위를 떨쳐 내기는 쉽지 않았지만 텐트를 치고 바깥에서 자고 있을 존을 생각하면 더는 속 투정을 하기가 미안했다.

초보 도보 여행자의 무모함과 자연의 냉정함이 뒤섞인 통가리로 노던 서킷 첫날이었다.


뉴질랜드 위대한 올레길(NZ Great Walks)

▣ 북섬(North Island)
▷통가리로 노던 서킷(Tongariro Northern Circuit, 45km, 3~4일) ▷와이카레모아나 호수(Lake Waikaremoana. 46km, 3~4일) ▷왕가누이 저니(Whanganui Journey, 145km, 3~5일)

▣ 남섬(South Island)
▷아벌 타스만 해안 트랙(Able Tasman Coast Track, 60km, 3~5일) ▷히피 트랙(Heaphy Track, 78.4km, 4~6일) ▷루트번 트랙(Routeburn Track, 32km, 2~4일) ▷밀포드 트랙(Milford Track, 53.5km, 4일) ▷케플러 트랙(Kepler Track, 60km, 3~4일) ▷파파로아 트랙(Paparoa Track, 55km, 4일)

▣ 스튜어트 섬(Stewart Island)
▷라키우라 트랙(Rakiura Track, 32km, 3일)

총 길이 606.9km, 소요 기간 41일~43일

   <다음 호에 계속>

글과 사진_박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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