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 자작나무 숲을 보러 갔다가

[문학의 숲] 자작나무 숲을 보러 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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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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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운 (필명)-

스콜라문학회 회원


작년 10월의 어느 날 동생 내외랑 강원도에 갔다가 인제 원대리에 있는 자작나무 숲을 찾았다.


국내 최대 규모라는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은 특히 남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군락으로 조성되어 지난 2012년에 개방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나무가 20년 이상 자라난 것들로 경관이 수려할뿐더러 숲 자체가 희귀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숲으로 향하는 산길이 나오지만 청명한 가을 날씨 속에 여유롭게 올라가는 길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찾는 고국이지만 고국의 가을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맑고 푸른 하늘, 덥지도 춥지도 않은 알맞은 기온, 그리고 들과 산에 다소곳하게 피어있는 가을꽃들, 이 모두가 서로 어울려 잘 연주되는 교향시(交響詩)처럼 언제나 다정하게 나를 반겨주었다. 


그날도 산길 양옆에 피어있는 코스모스와 구절초가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바람에 흔들거리며 우리에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꽃들의 손짓에 환호하고 숲속 여기저기 빨갛게 노랗게 색깔 잔치를 시작한 이른 단풍들의 숨바꼭질에 저기 좀 봐 저기 소리치며 우리가 한 시간가량 산길을 올라가자 조금씩 자작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날렵하고 곧게 위로 뻗은 자작나무의 몸통은 마치 은회색 페인트를 빗자루같이 큰 붓으로 휘적휘적 칠한 위에 여기저기 숯 검댕 눈썹이 제멋대로 붙어 있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다갈색이 진하다 못해 검게 변해가는 보통의 가을 나무들과는 너무도 다른 자작나무의 몸통이 토하듯 뿜어내는 색깔에 끌려 나의 걸음이 늦어지고 있었나 보다.


“오빠, 왜 내가 아까 점심을 꼭 막국수 먹어야 한다고 우겼는지 알아요?”하고 같이 걷던 동생이 별안간 내게 물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도 마음은 언제나 소녀 같은 동생의 물음이기에 나는 “글쎄, 왜 그랬을까? 여하튼 점심에 먹은 원대리 막국수는 정말 맛있었는데”하고 답했다. 그러자 동생이 한 무리의 자작나무를 바라보며 노래하듯 시를 읊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삼십 년이 넘게 여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던 동생답게 백석(白石)의 시가 입에서 쉽게 흘러나왔다. 백석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했기에 내가 “아하 백석의 백화(白樺)구나. 


그래서 꼭 국수를 먹자고 했구나”하고 내가 답하자 동생이 “앗쭈 오빠도 뭐 좀 아시네”하고 까마득한 옛날의 어린 누이동생처럼 까르르 웃어 우리 두 내외가 모두 산길에서 허리를 잡고 웃었다.


우린 다시 걷기 시작했고 산길은 조금씩 좁아지며 오르막이 가팔라졌다. “오빠 괜찮아요?”하고 걱정스레 묻는 동생에게 “그럼, 아직 이 정도는”하며 한 구비의 산길을 돌아 왼쪽을 바라보았을 때 와아 산허리를 가득 채운 자작나무 숲이 매복해 있던 군인들처럼 허리를 곧추세우고 우리를 맞았다.


수백 수천 아니 셀 수도 없이 많은 자작나무가 거기 도열해 있었다. 그곳이 시작이었다. 거기서부터는 온 산이 모두 자작나무로 뒤덮여있었다. 그걸 보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백석의 시(詩) 마지막 구절이 절로 떠올랐다.


‘산넘어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이곳 원대리에서 평안도 땅이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 산골이 온통 자작나무다라고 읊은 백석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산이 온통 자작나무로 뒤덮여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숲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나무들의 모임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자작나무들의 모임 아니 자작나무 가족들의 모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걸맞을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식구들이 많은 대가족인 것처럼 자작나무들은 몸통의 굵기에 따라 어른과 아이를 구별하며 희다 못해 푸르른 수피(樹皮)를 가족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유전인양 서로 인정하며 같은 모습 같은 태도로 오순도순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다툼도 경쟁도 없이 얌전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하늘로 하늘로 뻗어 오른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나는 나무들이 보는 나의 색깔과 모습은 어떨까 알고 싶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삼삼오오 아니면 쌍쌍이 와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빴다. 나도 동생 내외와 그리고 아내와 같이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난 길들을 이리저리 걸어보고 숲이 풍겨주는 나무 내음을 마음껏 가슴으로 들이켰다.


가을 오후의 태양이 키 큰 자작나무의 머리채 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아쉬움을 남긴 채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산길 양옆에 줄지어 피어있는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며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같이 보였다.


‘코스모스 예쁘지요? 우리말은 살사리꽃에요. 난 코스모스보다 살사리꽃이 훨씬 더 좋아요’라고 매제(妹弟)가 왕년의 국어 선생 남편답게 알려주었다. 살사리꽃, 처음 안 사실이었지만 나도 그 이름이 좋게 느껴졌다.


바람이 뒤로부터 불었고 살사리꽃이 길 양옆에서 하늘거렸고 앞에서 걸어가는 아내와 동생의 머리 위로 자작나무 숲에서 불려온 은회색 수피(樹皮) 가루가 하얗게 빛나는 것 같았다. 


길을 내려오는 내내 내 머릿속에선 가족 모임을 하듯 모여 서 있던 자작나무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저녁 자기 전에 시를 한 편 적어보았다.

 


자작나무 숲을 보러 갔다가 


나무는 모여서 숲이 된다

자작나무는 모여서 가족이 된다

사람은 모여서 무엇이 될까


자작나무는 서로 닮았다

닮은 나무끼리 모여 아름다움이 된다

닮은 사람끼리 모이면 무엇이 될까


자작나무는 온전히 벗었다

벗은 몸이 같이 모여 풍경이 된다

사람이 벗고 모이면 무엇이 될까


공연히 부끄러워져 자작나무 안으로 들어섰다

나무인 양 힘껏 두 손을 위로 뻗었다

그들이 나를 받아줄까


한참을 서 있다가 나무 밖으로 나왔다

자작나무 숲을 보러 갔다가

숲보다 더 다정한 나무들과

이야기만 나누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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