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어리석은 지혜로 판단하지 말라(Judge not with your human wisdom): The Bible(聖書)

인간의 어리석은 지혜로 판단하지 말라(Judge not with your human wisdom): The Bible(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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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의 책따라 생각따라(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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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Axial Age)’를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의 시기로 설정했다. 이 시기에 이후 인류의 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철학적, 종교적 전통이 태어났다.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대교, 그리스의 철학 등이 그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천재들이 나타난 역사상 가장 뜨거운 ‘창조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장자(莊子: 기원전 369년?~기원전 286년)는 중국 전국 시대 송(宋)나라 출신의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노자(老子)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본명은 주(周)이다. 


후세에 노자와 함께 부를 때 노장(老莊)이라 부른다. 도교에서는 남화진인(南華眞人), 또는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자>를 도가에서는 ‘남화진경’이라 부른다. 장자의 사상과 정신을 정통으로 계승한 사람들은 당나라 때(7세기~10세기)의 중국 선사(禪師)들이었다. 선(禪)은 불교가 노장(老莊)사상의 토양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현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동양사상은 어렵고 재미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 고전 철학은 기원전 550년부터 250년까지 약 300년간의 전국시대에 시작되었다.


고전(古典)은 살아있는 지혜의 보고이다. 하지만 다소 어려운 것이 흠이다. 누군가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메워줄 수 있다면 고전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장자>를 철학으로 읽으면 감감해진다. 그저 이야기로 읽으면 재미나고 구성지다. <장자>를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데, 어쩌면 번역한 분들이 어려운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장자>에서 ‘제물론’에 양행(兩行)이라는 말이 있다. 일체의 모순과 대립이 모순된 채 의존한다는 무한히 자유로운 경지를 의미하는 말이다. <장자>는 이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원문을 번역한 내용은 ‘조삼모사(朝三暮四)’에서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말했다. 아침에 셋을 주고, 저녁에 넷을 주겠다. 그랬더니 모든 원숭이가 화를 냈다. 


다시 아침에 넷을 주고 저녁에 셋을 주겠다 했더니 모든 원숭이가 기뻐했다. 사실 아무런 차이도 없는데, 기뻐하기도 하고 성내기도 한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고 일체를 자연의 조화 즉 천균(天鈞)에게 맡긴다. 이를 양행(兩行)이라고 한다. (聖人和之以是非 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단순히 번역만으로는 그 참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장자를 읽는 사람마다 이해하는 방법과 정도가 다르다. 정호성 신부는 ‘지인(至人)은 나와 남, 나와 사물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조화시켜, 제 길을 가게 하는 사람이다. 나도, 너도, 자연도, 내가 하는 온갖 일도, 제 길은 더불어 가게 하는 ‘어깨동무 길(兩行)’을 가는 사람이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또 다른 서양 신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참으로 어진 사람은, 문제의 양면을 치우치지 않게 봄으로 그 둘 모두를 도(道)의 빛으로 본다. 이것을 <한 번에 두 길을 따름(兩行)>이라 이른다‘라고 해석했다. 


원문(原文)의 직역도 중요하지만, 해설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원문과 해설을 참조해서 본뜻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장자의 대화는 플라톤의<대화록>과 대화 방법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목표는 같다.


자유인이면서 인생의 이야기꾼인 장자는 인간의 자연을 <도덕경>처럼 철학적 문장으로 암시하지 않고 사건을 들어 설명한다. <장자>에는 수없이 많은 재미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 하나 하나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과 휴식을 준다. 


장자는 이야기를 통해 인위적인 문화인을 벗어나 자유로운 자연인으로 살게 한다. 우리는 문화의 속박 속에 살아가고 있다. 밤낮으로 바빠서 쉴 틈(여유, 여백, 안식, 비움)이 없는 것이 만병의 원인이다.


중국인들은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는 유교의 예의범절을 따르고, 개인 생활은 도가(道家)의 무위자연을 추구하고자 한다고 한다. 삶의 기준은 ‘편안한 안주(安住)’가 아니라, ‘꾸준한 탈출 또는 비상(飛上)’이 아닐까 싶다. 


무심히 홀로 서서 어지러움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자유인(至人)으로서 <텅 비어 있으면서 꽉 찬 삶>,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삶이 아닐까?


  김영안

한국서예협회장, 전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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