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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 기자, 두 발로 걷다] 당신은‘하늘의 맨살’을 본 적이 있나요


박성기 기자, 두 발로 걷다 (2)

와이나무호수(Wainamu Lake)

평일 오전 11시, 작은 배낭을 메고 도보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와이나무호수(Wainamu Lake). 오클랜드 서쪽 베델스 비치(Bethells Beach)에서 1km 떨어진 곳이다. 가본 적은 없지만 내 머릿속에서 ‘호수’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데는 월든(Walden)이다.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2년 동안 머문 곳이 바로 월든 호수다.

‘월든’은 전 세계 도보 여행자들의 성지(聖地)와 같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삶을 잠깐이라도 흉내 내고 싶어 찾는다. 소로는 그곳에서 자연을 벗하며 지극히 사람답게 살았다. 걷고, 걷고 또 걸으며. 나도 어디에 있든지 그렇게 ‘풍요롭게’ 존재하고 싶다.


금모래 은모래 반짝이는 모래언덕 지나면

입구에서 호수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그사이 작은 사막이 있다. 아니 ‘모래 언덕’이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다. 강물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5분도 안 돼 검은 언덕이 보인다. 처음 방문한 여행자에게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금모래 은모래가 봄 햇살을 머금고 반짝인다. 일곱 차례쯤 조금 가쁜 숨을 내쉰다. 예쁘장한 호수가 나를 반긴다. 와이나무호수다.

큰 수건을 모랫바닥에 깐다. 그리고 하늘 보고 눕는다. 세상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게 없다. 배낭에서 시집을 꺼낸다. 마종기가 쓴 『하늘의 맨살』. 이번 여행과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책을 들고 왔다.


내가 원했던 일은 아니지만
안녕히 계세요
나는 이제 떠나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늘 떠나는 것이라지만
강물도 하루 종일 떠나기만 하고
물살의 혼처럼 물새 몇 마리
내 눈에 흰 그림자를 남겨줍니다.

‘디아스포라의 황혼’ 중에서

시집 몇 쪽을 읽다가 위를 쳐다본다. 구름 사이로 하늘의 맨살이 그대로 보인다. 하늘이 내게로 다가와 말을 걸 분위기다. 갑자기 박두진의 시를 서유석이 노래로 만든 ‘하늘’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노래를 흥얼거린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멀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뒷 부분은 생략)”

지긋이 눈을 감는다. 정말로 하늘이, 호수가 내게로 온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람결에 실려온 모래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쉴 만큼 쉬었다는 뜻이다.

큰 바다로 가기 전 헤엄치기를 배웠던 곳을

와이나무호수는 길이가 1km, 넓이가 200m 정도 된다. 둘레를 다 합치면 2.5km, 면적은 4만2천 평이다. 공교롭게도 150여 년 전 소로가 걷던 윌든호수와 크기가 비슷하다.(윌든은 1.8마일, 3km에 조금 못 미친다.)

와이나무호수는 여름에 가야 더 좋다. 사각거리는 모랫길이 끝나면 엄마 품처럼 푸근한 호수가 나오는데, 그 물에 풍덩 몸을 담글 수 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을 더러 본다. 또 널빤지를 가지고 와 모래언덕 위에서 호수를 향해 질주하는 젊은 친구들도 종종 만나게 된다. 열사(熱沙)를 지나온 뒤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고 배낭을 다시 걸머쥔다. 도보 여행의 목적을 다하기 위해서다. 호숫길을 따라 발걸음을 내디딘다. 레이크 와이나무 트랙(Lake Wainamu Track), 한 시간 거리다. 사람 하나 없는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옆에서 불어오는 호수 바람만이 내 산 동무다. 그게 안 돼 보였는지 가끔가다 이름 모를 새들이 나를 따라와 한두 소절 노래를 부르고 창공으로 치솟는다.

10여 분이나 걸었을까. 내 눈을 끄는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나무 중간에 열다섯 처녀의 젖가슴처럼 생긴 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 부문만 유독 초록색을 띠었다. 봄이다.

와이나무호수 트랙 중간쯤 작은 폭포가 있다. 높이는 5m 정도 된다. 와이토히폭포다. 1천여 년 전부터 이곳에서 터를 잡은 마오리족의 역사가 폭포 옆에 나무 기념비 하나로 남아 있다. ‘어린 마오리들이 큰 바다로 나가기 전에 헤엄치기를 배웠던 곳’이라는 설명이 눈에 띈다.

배낭을 내려놓고 땀을 닦는다. 폭포 물이 내 몸의 열기를 식혀준다. 삶은 계란 두 개와 커피를 꺼내 요기를 한다. 그러면서 그 옛날 이 물에서 멱을 감던 마오리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이 폭포는 지상 최고의 놀이터였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자연만큼 더 멋진 오락기구가 어디 있겠는가.


삶은 계란 두 개와 커피를 꺼내 요기를 한다.
그 옛날 이 물에서 멱을 감던 마오리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이 폭포는 지상 최고의 놀이터였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자연만큼 더 멋진 오락기구가 어디 있겠는가.


‘모래 산을 오를까, 실개천을 건널까.’

나랑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폭포를 뒤로하고 다시 발걸음을 이었다. 그다음 길은 평범하다. 가끔 호수 전경을 볼 수 있는 곳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밋밋한 길이다. 하지만 길 끝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와이나무호수 도보 여행의 백미가 기다리고 있다.

‘모래 산을 오를까, 실개천을 건널까.’

갑자기 고민이 생기는 지점이다. 위로는 검은 산이 떡 버티고 서 있다. 그렇다고 개울 길로 피해 가자니 명색이 도보 여행자인데 기분이 영 아니다. 모험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누군가는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쉽다’고 했는데, 남은 인생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내 기분에 족히 100m는 되어 보이는 암벽. 아니 ‘사벽’(沙壁)을 기어오른다. 중간에 숨 몰아쉬기를 쉰 번쯤 한 것 같다. 정상에 선 순간, 눈 앞에 펼쳐진 호수에서 물결 응원단이 힘차게 손뼉을 치는 게 보였다.

“아주 잘했어요. 굿 보이.(Well done. Good boy.)”

지난 1월에도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다. 그때는 물길을 탔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여름 끝물이 너무 예뻐서 발 목욕이라도 하고 싶었다. 내 경우는 믿거나 말거나이겠지만, 혹시 당신이 그 길을 고른다면 나는 무조건 믿어주는 아량을 보여주련다.

호수길을 걸을 때 조심하거나 신경을 쓸 게 몇 가지 있다.

길 중간중간에 ‘사유지’(Private Property)라는 간판이 보인다. 도전을 핑계로 샛길로 가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제발 ‘제 길’로만 가기를 바란다. 나는 품행이 반듯한 도보 여행자라 정해진 길로만 걸었다. 남의 ‘프라이빗’(사생활)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경험 많은 도보 여행자라도 모래 언덕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그 길을 오가기가 어렵다는 말이 아니다. 바람이 불면 모래가 사방으로 날린다. 여기서 ‘사방’이란 누군가의 귀와 입과 눈을 가리킨다. 온몸으로 금(모래)과 은(모래)을 껴안지 않겠다는 생각이라면 약간은 대비책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신경 쓸 것은.

도보 여행 끝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개울물이다. 샌들을 가지고 가거나, 아니면 신발 한 켤레를 버리고 동심으로 돌아가면 된다. 신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추억이 아닐까.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그러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된다.

7.3km를 두 시간 반 세 차례로 나눠 걸어

와이나무호수길 7.3km를 두 시간 반 동안 세 차례로 나눠 걸었다. 호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는 한 시간밖에 안 걸린다. 그 앞뒤로는 30분 정도 걸어야 한다. 그러니까 실제 걷는 시간은 영화 한 편 보는 정도다. 나머지 시간은 호수 앞에서 시를 읽거나, 폭포를 뒤로하고 요기를 하며 보냈다.

여행은 ‘쉬는’, 거다. 쉬기 위해서 걷는 것이지, 걷기 위해서 쉬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내게 있어 쉴 때 꼭 필요한 건 책(시집)과 먹을 것이다. 영육의 양식을 다 채워줘야 진정한 쉼이 있다고 믿는다.

‘시 읽는 남자’가 꽃을 든 남자보다 훨씬 더 섹시하지 않은가.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 『월든』에서)



글과 사진_박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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