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 한겨울에 만난 러시아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

[문학의 숲] 한겨울에 만난 러시아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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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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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루블료프 (1360~1430)의 의 대표작 '삼위일체' 1411년 작품 


–조이 (필명)-

스콜라문학회 회원

 


비가 많이 오고 추운 오클랜드의 겨울, 7월에는 늘 국제영화제가 열린다. 한국 영화도 물론 한두 편씩 선 보인다. 나는 ≪박쥐≫,≪하하하≫, ≪하녀≫ 등을 보았다.


일 년에 두어 차례 오클랜드 시내 퀸 스트리트에 있는 유럽식으로 잘 꾸며진 시빅(Civic) 극장이라 곳에 가기 위해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기도 하고 남편을 설득해서 프랑스 영화도 보고 이탈리아 영화도 본다.


영어 자막으로 이해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필름(Film)이기 때문에 몇 마디 대사를 놓친다 해도 큰 지장은 없다.


이번에는 타르코프스키를 좋아하는 지인의 초대로 세 시간의 상영 시간에도 불구하고 도전해 보기로 하였다.


타르코프스키는 예술 영화의 거장으로 영화를 시와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감독이다. 현대 영화 최고의 감독으로 뽑힌 스웨덴의 잉마르 베리만이 “영화를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타르코프스키 같은 영상시인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서 공산정권의 선전을 기대했던 그의 조국 구소련 정부는 자본주의적 예술 성향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그의 작업을 어떻게든 검열하고 통제하며 훼방하려 했다. 망명할 때까지 그런 감시망 속에서 그의 개인적인 고초는 지속하였다.


영화의 배경은 15세기 타타르제국의 침략을 받은 격동기의 러시아. 1400년부터 25년간 러시아를 유랑했던 종교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1360~1430)의 삶과 예술을 일곱 개의 일화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1410년경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삼위일체 이콘(성화)’이 1906년 완전히 복원되면서 역사상 주목받기 시작했고 1988년 러시아정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 그림은 러시아 정교회의 대표적인 이콘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삼위일체 성화 중에서 예술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수도사 안드레이는 저명한 다른 이콘 화가로부터 교회 장식을 도와달라는 부름을 받고 다닐, 키릴과 함께 여행길에 나서지만 그들은 전쟁과 약탈, 강간과 살인 등 참혹한 현실과 만난다. 


마침내 성상화의 대가 그리스인 테오판을 만나게 되고 테오판은 당시 기술적으로 빼어난 키릴대신 우직한 안드레이를 제자로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키릴은 절망감에 저주를 퍼붓고 떠나버린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수도원 밖의 현실(전쟁, 파괴, 살육, 굶주림 등) 그리고 용서와 구원에 대한 내적 갈등으로 하나님께 침묵의 서원을 바친 뒤 모든 말문을 닫고 더는 벽화를 그리지 않는다.


그렇게 7년을 견디던 중 단지 살아남기 위해 종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소년이 죽음의 공포를 껴안고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정점을 향해갔던 15살 소년의 운명을 지켜보며 운둔자의 길을 벗어나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여 삼위일체 이콘화를 완성하게 된다.


영화에는 그가 그림 그리는 장면을 좀처럼 볼 수가 없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무엇을 고민했기에 저런 작품을 남길 수 있었는가 보여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완성된 삼위일체 성화를 보여 줄 때는 장엄한 음악과 더불어 시종일관의 흑백 영상에서 칼러의 화려한 색채를 보여줌으로 그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였다.


타타르족의 오랜 지배와 몽골족의 처참한 침략에 당시 루시(러시아의 옛 이름)의 백성들은 비참하게 헐벗었고 어디서든지 도적 떼가 침몰하고 이교도들의 비행이 산재했다. 


세 수도사가 드넓고 황막한 벌판에 비를 피하며 찾아간 헛간 같은 곳에 모여있는 군상들의 모습은 추위에 지치고 허기에 찌들어 삶에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무력한 생명의 그림자를 드리운 적막한 외로움 그 자체였다.


타르코프스키의 명성대로 황량한 들판, 그리고 삶에 지친 사람들을 보여주는 그의 장면은 한편 한편의 가슴 아픈 아름다운 시이고 그림이었다. 그 가운데 비통한 삶을 지켜보는 안드레이의 무거운 몸짓과 고뇌에 찬 눈빛은 영화 전체에 흐르는 가치에 대한 생각을 좇아가게 해준다.


타르코프스키의 카메라는 정지한 채 풍경과 인간의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다. 그 흔들림은 살아있는 한 인간의 연약한 표정이라고 한다. 


그 연약함이야말로 인간 삶의 유일하고 진정한 가치이며 희망이라고 타르코프스키는 말한다. 아마 그 연약한 흔들림이 바로 그가 말하는 영혼에의 표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는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놓지 않는다.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관에 매료되었다. 타르코프스키에게 영화는 단순한 대중오락이 아니고 예술의 한 장르라고 한다. 예술이란 무한한 인간의 정신세계와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이고 나아가 인간 정신을 삼켜버리고 위협하는 물질에 저항하는 인간의 무기가 된다고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예술인으로서 감독은 철학자이며 예술가가 되어서 인간의 정신적, 영적 가능성의 절대적 자유라는 이념을 표현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에 나는 타르코프스키 감독에 대해 알게 되어 무엇보다 기뻤다. 인간 존재를 탐구해나가며 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예술로서 인간 구원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던 작가로서의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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