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 소리 없이 달빛 쏟아지고

[문학의 숲] 소리 없이 달빛 쏟아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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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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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밀밭. 


소리 없이 달빛 쏟아지고

 

-조이(필명)-

스콜라문학회 회원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한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3년 전 여름밤이었다. 은퇴한 남편이 오클랜드 근교 농장 지역으로 이사를 하자고 해서 집을 옮긴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결혼 후 거의 30여년을 도심에서만 살아오다가 산자락을 낀 한적한 곳으로 이사했다. 그 생경한 느낌에 자다가도 몇 번씩 깨곤 했다.


하루는 문득 눈이 떠졌는데 밖이 너무 환했다. 한 밤중인데 이리 환할 리가 없었다. 잠이 덜 깬 반쯤 감긴 눈으로 벽 쪽을 더듬어 바깥쪽 데크의 전원 스위치를 찾았다. 분명히 스위치는 꺼져 있었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싶어 밖을 내다보았다.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하이얀 보름 달빛 아래 산등성이 언덕은 너무도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저 멀리 연못가에 삐죽삐죽 멋대로 가지를 드리운 마누카나무들, 큰 우산을 펼쳐 든 듯한 고사리나무들, 그리고 이름 모를 나무들은 무도회에라도 온 듯 은빛으로 성장하고 우아하게 서 있었다.


그들의 축제를 지켜주려는 듯 목장 울타리 쪽의 키 큰 아름드리 캘리포니아 소나무들, 산언덕의 풀들은 달빛 속에서 쩌렁쩌렁, 서걱서걱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어머나 밤에도 이런 세상이 살고 있었구나.


지극히 그윽하고 맑고 고요한 이 은빛 세계. 소롯이 잠이 든 새들의 숨소리도, 날아다니는 풀벌레 날갯짓의 소리도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은밀한 밤의 소리였다. 


창밖의 그 신비로운 정경에 넋이 나간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숨 막히게 적막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을 엿본 그 순간은 나의 삶에 새롭게 던져진 비밀스러운 기쁨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시 읽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달밤의 정경은 가슴이 뛰었던 그날 밤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이효석은 장똘뱅이 허생원의 애환을 향토색이 짙은 어휘를 사용해 서정적이며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풀어냈다.


허생원은 얽둑배기이고 장터의 개구진 각다귀들한테도 어른대접을 못 받는 왼손잡이다. 그는 항상 나귀를 데리고 다닌다. 나귀는 20년을 같이 떠돈 소중한 그의 가족이고 분신이다. 한번은 투전에서 나귀까지 잃을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그 유혹을 이겨내고 울며 마을을 빠져나오기도 한다.


그는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을 그리운 고향이라 생각하고 거꾸러질 때까지도 길을 걷다가 달을 보며 죽겠다고 한다. 밤새 힘들게 걷고 또 걸으며 이 마을 저 마을로 옮겨 다니는 것이 그의 일상이지만 장터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보름달이 훤하게 밝은 밤이면 어김없이 그의 인생에 딱 한 번 있었던, 그 기이한 인연을 달빛의 낭만에 젖어 풀어 놓곤 한다. 그러면 무던한 그의 오랜 친구 조선달은 싫증을 내지도 못하고 그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야 한다. 허생원은 이십 년의 장돌림 동안 별로 이익도 못 보는 추억의 현장인 봉평장을 빼놓지 못하고 거쳐 간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낭만적인 사람이다. 그날도 역시 보름달 달빛이 부드럽게 그 일행들을 비추어 주는 밤이었다. 허생원은 달빛을 받으며 메밀꽃이 소금을 뿌려놓은 듯 숨이 막히게 피어있는 아름다운 산길을 걸으며 그 낭만적인 추억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이번 봉평장에서는 동이를 만나 대화장까지 동행하게 되면서 동이의 내력을 듣게 된다. 개울을 건너며 동이 어머니가 봉평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버리지만 ‘뼈에 사무치게 따뜻한’ 동이의 등에 업힐 수 있어 그는 행복했다.


친구에게 놀림을 받지만 그는 느긋하게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나귀의 새끼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한다. 동이가 그토록 아름답게 남아있는 추억의 여인의 아들일 거라는 확신에 그의 인생은 희망이 넘치게 된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느껴지던 나이도, 개울을 건널 때의 뼛속을 찌르는 차가움도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쓸쓸했고 뒤틀렸던 그의 생이 한순간에 흐뭇하게 흘려진 달빛처럼 푸근한 것으로 바뀌었다. 단 하룻밤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평생 고독한 삶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 사실이 새삼 경이롭다.


쓸쓸하고 뒤틀렸던 삶을 살다간 고흐가 생각난다. 유명한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생전에 그의 삶은 실패투성이였다. 번번이 실연을 당했고, 직장에서 쫓겨났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에게도 버림받았다.


20대 후반에 시작한 그림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3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죽기 전 10년 동안 1000여 점의 그림을 그렸으나 단 한 점의 그림만 헐값에 팔았다. 그는 불행했고, 외로웠고, 가난했다. 그림 그리는 일 외에는 오직 들판을 서너 시간씩 쏘다니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젊은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 그에게도 간절했던 사랑의 추억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평생 소중히 간직할 하룻밤의 사랑만 있었더라도 그의 영혼은 그리 불행한 가운데 정신병동에까지 가서 외로운 죽음을 맞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랑이 흔한 세상이라고는 하나 단 하나뿐인 나의 사랑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의 끈을 소중하게 붙잡고 오늘도 소박하게 나의 사랑을 가꾸어가며 사는 것 같다.


길지 않은 작품이지만 읽은 뒤의 여운은 깊고, 장면 장면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으로 남는다. 읽고 또 읽고 싶어진다. 산책하면서 그토록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그 문장들을 암송하고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다.


땀 흘려 걷고 또 걸어야 하는 장똘뱅이의 고단한 발자국 하나하나에 새겨진 땀방울의 아름다움, 자연의 아름다움, 사랑의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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