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_윤교진 크라이스트처치 한국학교 교장

인터뷰_윤교진 크라이스트처치 한국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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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한인사회 봉사 활동은 이민 생활을 하면서 성취감과 행복을 준

그리고 나를 깨닫게 해주고 성장시킨 큰 바위 같은 버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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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교진 교장은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매 순간 행복했다”고 말했다. 


크라이스트처치 한인회 전 회장이자 현 크라이스트처치 한국학교 윤교진 교장이 2023년 새해 공로 훈장을 받았다. 


새해 공로 훈장(New Year’s Honours) 명단은 지난해 12월 31일에 발표됐는데 이 훈장은 매년 새해를 맞아 다양한 분야에서 뉴질랜드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지난 5월 30일 웰링턴에 있는 거버먼트 하우스(총독 관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윤교진 교장은 故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대신한 신디 키로 총독으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았다. 


외국인이자 이민자로서 英 연방 최고 지도자에게 받는 훈장의 의미는 더욱 남다를 것이다. 이는 개인의 기쁨을 넘어 뉴질랜드 내 한인 사회의 자랑이자 영광이다. 


윤교진 교장을 만나 그동안 뉴질랜드 이민 후 생활과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활동,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들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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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여왕 공로 훈장을 받은 후 신디 키로 총독과 기념사진.


Q. 언제 이민 오셨고 이민 오신 후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1994년 결혼과 동시에 이민을 결정하고 영주권을 취득한 후, 1996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정착해 살기 시작해서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1996년 전 임신 중이어서 오자마자 6월에 첫 아이를 낳았고, 이후 집에서 아이 양육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주말부부였던 바쁜 생활에 지쳐 있던 저와 남편은 여유로움을 찾아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이민 초에는 가든 시티의 전원과 소도시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생활했고 둘째 아이를 가져 저는 거의 남편의 전적인 경제적인 지원을 받으며 아이 양육만 했습니다.


Q.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사회를 위한 활동은 언제 처음 하셨고 무엇을 하셨는지. 

한인사회를 위한 활동이라고 할 거까지는 없습니다. 한국인들이 많지 않던 이민 초기에는 일 년에 한두 번 성당이나 공원에서 교민 행사가 치러졌는데 그때 무용공연을 요청받아서 1996년부터 성당이나 아트센터에서 한국무용이나 현대무용을 혼자 공연했어요. 종교단체에서 아이들 사물놀이나 춤을 가르쳐 공연도 했고요.


그 꼬마들이 지금은 엄마·아빠가 되어 거리에서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보고 가신 다른 나라 소사이어티에서 멀티 컬처 행사에 초대받기도 했고 일본이나 중국, 필리핀 다문화 페스티벌에 초대되는 등 점차 많은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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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교진 교장이 한국 무용 공연을 하고 있다.


Q. 2011~2015년 크라이스트처치 한인회 회장을 역임하셨다. 회장을 하겠다고 마음먹으신 계기는 무엇인가.

서른 후반쯤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자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문득 이민와서 건강하고 무탈하게 지낸 것에 감사한 마음이 많이 들더라고요. 


무언가 이 나라와 이웃에게 감사의 마음이 생겼고 워낙 어릴 적부터 남과 함께 공유하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곳을 찾던 찰나에 어느 분의 소개로 한인회에 가게 되었고, 2009년부터 컬처 디렉터로 봉사하면서 문화축제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교민사회에서 교민들만 모여 했던 축제를 멀티 컬처 행사로 발전시켜 많은 현지인과 이민자인 다문화 민족 등 만 오천 명이 와서 아주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칠 수 있었고 이후 코리안데이는 범시민적 행사가 되었습니다.


아마 그때 제가 교민들에게 리더십을 인정받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한인회 회장이 되겠다는 큰 포부가 있었던 건 절대 아니고 그냥 물 흐르듯 제가 행복하고 즐기는 일을 했고 다른 분들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 회장을 오래 할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저의 공약이 생각나네요. ‘가족 같은 한인회, 친구 같은 한인회, 즐거운 한인회, 하나 되는 한인회, 약속을 지키는 한인회장’으로서 교민분들께 향기로 남고 싶습니다.


Q. 또 2019~2021년 또다시 한인회장으로 봉사하셨다. 왜 또 하셨나.

예. 그것도 물 흐르듯이 맡겨진 거에 순응했습니다. 13대, 14대 한인회를 거치고 그다음 회장이 나오지 않아 3개월이 공석이었고 그때 한인회 회장을 뽑기 위해 구성된 위원회에서 요청하셨고 기관 펀딩과 한인회에서 운영하는 사랑방 및 여러 과제가 공석인 상태로 놔둘 수 없었고 저의 임기 때부터 진행해 온 것이라 한 번 더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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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교진 교장은 현지 학생 대상으로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힘썼다.  


Q. 그동안 한인사회를 위해 활동하면서 가장 보람이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

교민 분들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교민분들께 먼저 감사하단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별 탈 없이 한인회를 이끌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하고, 제가 많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100여 명의 훌륭한 임원들과 협력위원 그리고 자문위원과 수많은 자원봉사자 등 제 인생에서 귀한 분들을 만난 게 전 너무 좋았습니다. 


저에겐 매 순간 즐겁지 않은 일이 없었고 늘 제 가슴을 벅차게 했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설렘으로 시작했고 가슴 벅찬 보람으로 늘 마칠 수 있었지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저에게 가장 행복했고 많은 새로운 경험과 재능 있는 분들을 만나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분들을 만나서 늘 깨닫는 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그러던 중 한인회에 도움을 받으신 분들이 잊지 않고 오셔서 받은 것 이상 그 몇 배로 교민사회에 봉사하시고 가실 때면 그런 한인사회의 모습에 제가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큰 보람으로 느껴집니다. 


Q. 반대로 가장 어려웠던 일이 있었다면.

지나고 나서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웠던 순간들도 결국은 저와 교민들이 성장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축복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자연재해인 두 번의 지진으로 너무나도 분주했던 시간과 많은 교민이 생업의 어려움을 겪고 이 도시를 떠나는 상황을 겪으면서 가슴이 아팠던 순간입니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도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주신 모든 교민분들이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한인회 운영비를 마련하는 게 쉽지 않은 일었는데 이것이 저의 회장 임기 동안에 가장 어려웠던 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진 이후 교민 수가 많이 줄었고 교민 경제가 어려워지고 정부 지원금이 삭감되면서 어려움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단체와 업체, 교민들의 도움으로 더욱더 교민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부서별 프로젝트를 내실 있게 발전시켰고 이로 인해 교민 모두 화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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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이스트처치 한국학교 교사들과 함께.

Q. 올해부터는 크라이스트처치 한국학교 교장을 맡았다. 맡게 된 배경은.

한국학교는 한인회 일을 하면서도 6년 동안 오전 특강반에서 한국무용을 지도해 왔습니다. 15대 회장직을 마치면서 2년여정도 한국도 다녀오고 쉬려고 했는데 교장 후보가 나오지 않아 주위에서 권유하셨고 고민 끝에 맡게 됐습니다. 


Q. 교장 선생님에게 있어 한인사회 봉사는 어떤 의미인가.

저에게 있어 한인사회 봉사 활동은 뉴질랜드 이민 생활을 하면서 성취감과 행복을 준 그리고 나를 깨닫게 해주고 성장시킨 큰 바위 같은 버팀목이었습니다. 


Q. 오랫동안 한인사회에 봉사한 공로로 최근에 여왕 훈장을 받으셨다. 소감 한 말씀. 

제가 참으로 과분한 자리에 섰습니다. 감히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더 앞서는 까닭은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하시고 일생을 헌신하며 살아온 분들이 많을 텐데 제가 감히 그런 자리에 서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지난 시간이 온전한 희생이나 헌신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제가 얻은 것, 배운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여러 선배님에게 배우며 더 겸손하게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깊은 애정 어린 축하인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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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함께.


Q. 자제분들 교육도 독특하게 하셨다고 들었다. 

제가 어린 나이에 아기를 낳아 제대로 잘 키웠는지 가물가물합니다. 많이 놀아주고 함께 교감하면서 늘 칭찬을 해줬던 거 같아요. 제가 칭찬받는 걸 좋아해서 저도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오늘은 무슨 칭찬을 해줄까’ 늘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바빠지는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진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저의 춤을 보고 자란 둘째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춤을 추기 시작했고 지금 힙합댄스 아티스트로 시드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별하게 키우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그냥 아이들의 생각을 막지 않았고, 그 작은 세계라도 함께 교감하며 재미나게 놀았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제 눈에 보여지는 아이들은 언제나 기대 이상이었고 스페셜하고 그 자체만으로 빛나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늘 표현해서 말해주었죠. 한마디로 오바쟁이 마미였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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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교진 교장은 오랜 기간 한인 어르신을 위한 사랑방을 운영했다. 


Q. 한인 사회에 봉사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점이 있다면.

늘 처음이 있는 법이고 때론 실수와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더욱더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면 저희 봉사하는 모든 분이 사랑과 열정으로 그 실패를 딛고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체험을 한 저로서는 교민 여러분께 따뜻한 관심과 아낌없는 격려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Q.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건강을 유지하며 무탈하게 지금과 같이 살고 싶습니다. 15년 넘게 앞에서 리더로 많이 일했다면 이젠 뒤에서 조금 더 작은 일들로 봉사하고 싶습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절제와 비움을 실천하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로 살고 있고, 분주한 시간을 보낸 만큼 앞으로는 조금 더 느리게 살아볼까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언제까지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할 계획인지 물었다. 윤 교장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못 했다. 이민 생활 대부분을 한인사회 봉사로 보낸 열정 가득한 윤 교장에게 있어 그 일의 마지막 날은 아마도 없는 듯했다. 


윤 교장이 이번에 수상한 공로 훈장이 그가 그동안 펼쳐 온 봉사 활동의 결승선이 아닌 또 다른 봉사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선으로 보이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한인사회를 위해 쉼 없이 달리고 있는 그의 선한 영향력이 많은 이에게 더 퍼지길 기대해본다. 

 

임채원_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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